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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신앙심 또는 신념
    수필/신작 2015. 6. 23. 21:11

     

     

     

                                  

                                      

                                            어떤 신앙심 또는 신념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주일미사 참례를 하러 성당에 가면, 천주교대구대교구가 발행하는<<대구주보>>8면짜리 소책자를 받게 된다. 이번호 4이달의 성인성 토마스 모어(622, 순교자 1477~1535)’에 관한 글이, 코가 유난히 오똑하고 이지적(理智的)인 눈을 가진 그분 흑백사진과 함께 실려 있었다. 그 글을 끝까지 읽는 동안, 실로 형언할 수 없으리만치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사를 마치고 귀가한 나. 그분 생애에 관해 더 알아보고자 밤늦도록 인터넷 검색창에다 이런저런 검색어를 입력하였다. 그리하여 얻게 된 정보를 독자님들과 공유코자 한다.

           우선, ‘가톨릭 사전에는 그분의 생애를 아래와 같이 요약해서 적고 있다.

           ‘1478-1535. 저명한 법학자요 저술가인 토마스는 헨리 8세 때 영국의 대심원장이라는 중책에 오르기까지 다양한 관직을 맡아 일했다. 헨리 8세가 본처인 캐서린 황후와 이혼하는 것을 승낙하지 않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구금되었고 결국 참수당하였다. 그는 법률가들의 수호성인이다. 전례 거행은 622(선택 기념일)이며 주제는 교회법에 대한 충성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키백과에는 그분의 생애를 보다 상세히 적고 있는데, 그 일부를 베껴다 붙여보겠다. 이는 최근 들어 내가 새롭게 추구하는, 꼴라주(collage) 형태의 수필 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에서의 왕위지상권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잉글랜드 성공회의 교회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대한성공회의 교회력에도 이름이 수호성인으로 올라와 있다.

           1502년 헨리의 맏형 아서가 죽으면서 헨리가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의 법적 상속인이 되었다. 그리고 1509년 그는 스페인과의 동맹을 지키려는 목적에 따라 형의 미망인 아라곤의 캐서린, 곧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를 위해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1)성서 구절에 의거하는 교회법에 위반되지 않으려고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관면을 받았다. 아서와의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캐서린의 진술이 관면을 받는 데 부분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오랫동안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 생활은 무난하였다. 그러나 캐서린이 후계자인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는 결국 캐서린 왕비의 시녀인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 매혹되었으며, 나중에는 앤 볼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1527년 헨리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캐서린과 그의 혼인을 무효로 해줄 것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탄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는 교황이 성서 말씀보다 우위에 설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과거 율리오 2세가 내린 관면 역시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교황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헨리는 울지의 대법관직을 사임시키고 152910월 토머스 모어를 그 자리에 대신 앉혔다. 헨리는 그 다음에 교황은 단지 로마교회의 주교에 불과하며, 따라서 전체 교회에 대한 수위권을 지닐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이상 위키백과에서 베껴옴.)

            지금부터 다시 내 글로 채워가려 한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을 일컫는 유토피아(utopia)’란 말을 최초로 썼던 분이다. 동시에 <<유토피아>>란 명저를 적은 분이기도 하다. 그분은 그리스어 ‘ou-(없는)’와 ‘toppos(장소)’를 조합하여 ‘utopia’란 말을 만들어냈다. 한편, 그분이 만든 ‘utopia’는 그리스어 ‘eu-(좋은)’와 ‘toppos(장소)’를 조합한 좋은 곳(good- place)’을 연상토록 하여 중의적(重義的)임을 알 수 있다. 그 낱말 하나만 보더라도 그분이 대단히 빼어난 저술가 내지 작가였음을 짐작케 한다. 유토피아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을 일컫기도 하지만, 모어의 함의(含意)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비토피아(ubitopia)’였을 거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가톨릭 사전위키백과의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요즘으로 따지면,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를 다 합친 권력을 거머쥔 권력자였다. 국왕 헨리 8세의 총애를 받았던 충신이었다. 그러했음에도 헨리 8세의 부당한 횡포를 끝까지 눈감아주지 못했다. 특히, 헨리 8세가 죽은 자기 형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으면서 시작된 일련의 여성편력(?)은 차마 눈뜨고 보아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밝히지만, 헨리 8세는 한 때 형수였던 이를 아내로 삼고, 심드렁해지자 다시 왕비의 시녀에 눈독 들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다시 또다른 여자와 결혼코자 교황청에 이혼허가서와 결혼허가서를 제출하는 등 무리수를 두게 된다. 나아가서, 1534년 헨리 8세는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은 국왕이라는 이른바 수장령을 선포하여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성공회를 세우게 이른다. 이에, 모어는 수장령 선서를 거부하고 대법관에서 사임하게 된다. 모어는 새 왕비의 책봉식에도 초대를 받긴 하였으나, 참석치 않게 된다. 결국 헨리 8세의 분노를 사게 되어 런던탑에 갇히게 된다. 1535년 모어는 반역죄의 죄목으로 참수형을 받고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분이 형장(刑場)에서 남긴 말들은 아주 유명하다는 걸 오늘밤에야 새삼 알게 되었다. 처형날짜는 76일이었다. 처형대에 올라간 그분은 구경하려고 몰려든 군중을 향해 나는 국왕 폐하의 충실한 종복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이전에 순종하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 미끄러운 단두대 계단을 오를 적에 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 아닌가.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려올 때에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 집행관이 천으로 눈을 가려주려 하자, 스스로 준비해온 린넨 천으로 눈을 가렸다고 한다.

           집행관한테 이런 말도 하였다고 한다.

           내 목은 잘라도 내 수염은 자르지 말게. 내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 사형집행 직전 자신의 수염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단두대에 잘리지 않도록 애썼단다.

           또 다시 집행관에게 일렀다고 한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그처럼 신앙심과 신념이 투철했던 그분.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그러한 위트와 유머가 있었다는 것도 신비스러울 따름이다.

           런던탑 감옥 옆에 긴 수염이 달린 토마스 모어의 머리가 창에 꽂힌 채 몇 주째 걸려 있었다는데, 비가 내내 그치지 않고 내렸다고 한다. 군중은 그 비가 신의 눈물이라고 수군댔다고 전한다.

          그분의 생전 어록 가운데서 정의는 사회의 강력한 접착제다.”는 특히 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분은 자신의 묘비명에 스스로를 이단자들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사람라고 적었다고 한다.

           , 밑도 끝도 없는 나의 이야기 그냥 대충 정리해보도록 하자. 정치적인 이유로, 신앙심 때문에, 신념 때문에 무참히 죽임을 당했던 동서고금의 그 많은 위인들, 그 많은 순교자들. ‘권불십년 세불백년 (權不十年 勢不百年)’이란 말이 있거늘, 어찌 절대 권력자 내지 최고 권력자라고 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그 가까운 십년 앞도 내다볼 줄 모르고,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그처럼 무모함을 행해 왔는지? , 권력에 빌붙어 헤헤거리거나, 손바닥을 비비되, 손 지문(指紋)이 다 닳아 지문 감식도 어렵도록 하는 이들이 생각밖에도 많다는 것을. 사실 권력에 맛들여진 이들은 이 여름밤, 내 농막의 외등(外燈)에 몰려드는 저 무수한 부나방과 그 속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날이 밝으면 내가 언제 그 곳 둘레를 서성댔더냐 하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는 점.

           끝으로, 토마스 모어는 우리네 가톨릭 교회에서는 법률가, 정치인, 공직자의 수호성인(守護聖人)으로 받들어지고 있음을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 전한다. 덤으로, 토마스 모어 성인의 축일은 매년 622일임을 알려 드리며 글 맺기로 한다.

     

     

           1)성서 구절 :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짓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 (레위기 2021)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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