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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물리치기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이런 경우에는 너무도 잘 알려진 손자병법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 아니 할 수가 없다. 바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란 병법. 나는 멧돼지들과 겨룸에서, 그것들 습성을 새롭게 안 덕분으로 이긴 듯하다. 그 동안 우리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지부터 소개함이 옳겠다.
보름 전쯤 내 농장과 도보로 10여분 걸리는, 속칭 ‘금정골’ 골짜기 300여 평 두 뙈기 나란히 붙은 묵정밭에 내리 이틀 꼬박 들여 들깨모를 심은 바 있다. 본디 그 묵정밭은 남의 소유이지만, 벌써 20여 년째 묵혀 두었기에 아주 마련 없었다. 해서, 지난겨울 농한기를 틈타 그곳에 빼곡 들어찬 잡목을 톱으로 낫으로 베어냈다. 한편, 올 이른 봄부터 두세 차례 잡초 전멸제초제를 쳐서 아주 멀쩡하게 본디 밭 모양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내 자랑 같지만, 이쪽 어르신들도 그 광경을 보고서 매우 놀라워한다. 특히, 내가 그 많던 나무딸기를 뿌리째 뽑지도 않고, 소위 ‘(뿌리로) 이행성 제초제’로 전멸시켰다는 거. 그 점은 내가 생각해보아도 ‘발상의 대전환’임에 틀림없다. 하여간, 그렇게 제법 손쉽게 다듬은 밭은, 낙엽이 쌓이고 썩고를 거듭함으로써 유기질이 아주 풍부함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토양은 병충해도 없어, 수익성이 높은 고추재배 최적지이긴 하지만, 올해는 우선 들깨부터 심었다. 들깨를 심게 되면, 그 무성한 잎과 줄기로 하여 그 발치에 잡초가 맥을 못 춘다는 거. 그러면 내년 다른 작물재배에 이롭다는 것쯤은 웬만한 농부는 다 안다.
사실 들깨모를 심으면서 멧돼지들한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그것들은 내가 장만해둔 밭의 상태가 미흡하다고 생각했던지 마치 로터리를 치듯 갈아둔 상태였다. 즉 주둥이로 온통 뒤져 밭갈이를 해두었더라는 것이다. 현장인 그 밭에 들깨모를 기르는 동안 거의 이틀 간격으로 물을 주면서 혼잣말을 하곤 하였다.
‘고마운 멧돼지들, 내가 힘들다고 로터리까지 이렇게 다 쳐 두다니! ’
하여간, 일단은 멧돼지들의 도움으로(?) 이틀 걸려 그 밭에다 들깨모를 다 심었다. 그러고서는 이 밭 저 밭 시차(時差)를 두고 들깨모를 현지 밭에 붓고, 또 시차를 두고 들깨모를 심었다. 그렇게 혼자서 한 바탕 들깨모를 심는 데 소요된 시간은 얼추 10일가량, 들깨모 심은 총면적은 2000여 평. 해서, 그 금정골 밭 들깨모가 잘 자라는지 여부를 보살피러 갈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썩 좋지 않은 소식은 이웃마을에 사는 객지친구 ‘태OO’로부터 듣게 되었다.
“윤형, 자네 말만 믿고 그곳 금정골 밭에 남겨두었다는 들깨모 추러 (뽑으러) 갔다가... . ”
그의 나쁜 소식을 듣고서 그곳으로 가 보았다. 숫제, 난장판을 만들어 두었음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태OO’로부터 처음 듣게 된 사실이다. 멧돼지들이 비온 후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해 그렇게 한다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멧돼지들도 지렁이를 잡아먹음으로써 부족한 고급 단백질을 섭취한다는 말이렷다. 그곳이 지렁이가 득실댄다는 것은 토양이 아주 건강하다는 뜻일 테니, 한 녘으로는 고맙긴 하지만... . 기왕에 시작한 일을 아니, 사업을 지레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시쳇말로 ‘의지의 한국인’인 내가 정말로 지레 포기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씨앗을 무려 두 되씩이나 부었으니, 들깨모는 이 밭 저 밭 아직 넉넉히 남아 있는 터.
나는 그곳 밭에 들깨모를 하루 종일 ‘기워심기[補植]’ 하기에 앞서, ‘멧돼지 퇴치법’부터 기어이 알아내어야만 하였다. 물론 퇴치법은 멧돼지의 습성과 맞물려 있다. 그리하여 내가 알아낸 멧돼지의 일반적 습성은 이런 것들이다. 야행성이며 겁이 많다는 점, 시력이 제법이나 안 좋다는 점, 시력이 안 좋은 데 비해 후각이 아주 발달되어 있다는 점, 집돼지도 산으로 도망가면 이내 야성(野性)을 되찾는다는 점 등. 가축들 가운데 가장 빨리 야성으로 돌아가는 게 돼지라고 알려져 있다. 만약에 집돼지가 산으로 가면, 그 뭉툭하던 주둥이가 차츰 불거져 나온다고도 한다. 열악한 생활환경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렇게 변모한다니! 내가 들깨모를 안전하게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얼추 찾은 셈이다.
나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태양 에너지 이용 야간조명등을 세 개 준비하여 밭에다 꽂았다. 쓰다가 남은 유제 농약병, 분제 농약봉지 등을 모조리 가져가서 밭 가장자리에 뿌렸다. 땀내 나는 타월과 땀에 절은 작업복을 밭둑에다 던져두었다. 그리고 이 연수원 기숙사 객실에서 쓰다가 닳아 교체한 세숫비누 한 박스를 얻어다가 밭에다 이리저리 던져두었다. 한편, 내 귀여운 것들인 강아지들 셋을 데려가서 내가 들깨모 기워심기 하는 내내 그곳에서 놀도록 하였다. 사냥개를 가장해서 그것들 냄새를 남기고자 그렇게 하였다. 중고 라디오를 구해다가 왕왕 음악을 틀면 좋겠으나, 그것은 쉬이 구하지 못해 일단은 보류해 두었다.
내 신실한 독자님들께서는 분명 이렇게 물으실 것 같다.
“그랬더니요?”
하루 종일 걸려 들깨모를 기워심기 하고서, 며칠이 지난 다음, 그 밭에 다시 가 보았다. 시쳇말로, ‘기분 만땅!’ 이었다. 더 이상 멧돼지들의 흔적은 없었다. 아직은 두고 보아야 할 테고, 들깨모도 예비로 남겨두어야 할 테지만... .
이제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나한테 새삼스레 하루 수고롭게 하였다고 멧돼지들을 탓할 일이 이니다. 그 녀석들이 온 밭을, 심지어 밭둑까지 그렇게 알뜰히 주둥이로 갈아주었기에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많이,보다 넓게 들깨모를 심을 수 있을 수 있었지 않으냐고? 세상사 모두 그러한 이치일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 전화위복(轉禍爲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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