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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은 파리 목숨이다수필/신작 2017. 12. 2. 23:24
용역(用役)은 파리 목숨이다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오늘을 포함해서 격일제로 16일만 24시간씩 근무하면, 이른바 ‘편한 백성’이 된다. 이 아파트 전기주임으로, 어느 용역회사와 맺은 1년 고용계약이 12월 31일자로 끝난다는 뜻이다. 정작 나는 몰랐으나, 서너 달 전부터 어느 악질적인 입주자가 관리소장과 우리가 소속된 용역회사 간부한테 압력을(?) 행사해서, “사람 바꾸어 달라”고 했던 모양이다. 사실 그는 이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간부도 아니고, 동(棟) 대표도 아니어서 대표성이 없다. 단지, 727세대 가운데에서 1이니, 1/727에 불과하다. ‘1/727’이란 자기 분수(分數)도 모르고, 개망나니처럼 설쳐대며 나를 포함한 17인의 아파트 관리 용역회사 직원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그렇게 함부로 행사했다. 나를 포함한 17인은, 그 인간한테 온갖 시달림을 당해 왔는데, 내가 대표로 나서서 나직이 그에게 충고했던 적은 있다. 대표성이 없으며, 언어폭력이심하고, 업무방해에 해당하는 짓이니 앞으로 자제해달라고. 하더라도, 관련 노동관계법이 있어, 내가 소속된 용역회사 간부들은 중도에 나를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재계약은커녕 계약기간만료일만 기다렸던 듯하다. 나도 한 때 어느 국영기업체의 인사부서장을 지낸 바 있어, 그 고충을 충분히 이해한다. 참으로, 내 조직에 누를 끼친 듯하다.
‘용역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니... .’
용역, 서양식으로 말하면 ‘Service’인데, 이 용역 내지 용역회사 제도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정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속 시끄러운 경비나 청소나 소방 따위의 업무를 전문 용역업체에 맡기는 일이 잦다. 이는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다. 해서, 우리는 인력시장의 ‘용원(傭員)’일 따름이다.
이제 내 이야기는 외연(外延)을 넓혀, 용병(傭兵)에까지 닿게 된다. 스위스는 세계적인 용병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산악지대에 살아, 넓은 농토도 없어 빈곤한 삶을 이어가야 했는데, 남자들은 벌이가 좋은 용병에 나서는 전통을 이어왔다고 한다. 지금도 바티칸을 지키는 군인들은 스위스 용병이라지 않은가. 목숨을 담보로 남의 나라 싸움에 나서야만 했던 스위스 용병들. 그들은 용맹하였고, 부리는 이들한테 끝까지 배신 때리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들 스위스 용병들을 ‘라이슬로이퍼( Reislaufer)’라고 일컫는단다.
내 신실한 애독자 여러분께서는 그들 스위스 용병의 활약상이나 애환 등에 관해서 인터넷 등을 통해 좀 더 상세히 알아보실 것을 권해 본다. 대신, 스위스 용병을 애도하는 위령비가 스위스 ‘루체른’ 공원에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만 덧붙이기로 한다. 바로 <瀕死의 獅子相>이 그것이다. 이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전사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위령비이다. 덴마크 출신 조각가였던 ‘토르발센’의 작품으로, 프랑스 왕조 부르봉 왕가의 문장(紋章)이었던 흰 백합이 그려진 방패 위에 부러진 창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자의 용맹스러움이 묘사되어 있다. 자연석인 거대한 바위 중간을 쪼아서 사자를 조각한 모습이다.
참, 스위스 용병으로 인해 생겨난 말이 하나 있다는 것도 빠뜨릴 수가 없다. 바로 향수(鄕愁) 내지 향수병(鄕愁病)으로 번역되는 ‘노스탤지어(nostalgia)’. 1688년 오스트리아 의학도 ‘요하네스 호퍼(Johannes Hofer,1669~1752)’가 논문 ,<향수병에 관한 의학적 논의>에서 최초로 쓴 말이라고 한다. 그는 산 속에 주둔한 스위스 용병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해서 ‘nostos(return)-’와 ‘-algos(pain)’를 합성하여 ‘nostalgia’라고 맨 처음 불렀단다. 의기소침·우울증 동반·과도한 눈물·식욕감퇴의 증세를 보이게 되며, 때로는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된다고 논문에서 밝혔다는 거 아닌가.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간다. 허두에서도 이미 밝혔듯이, 나는 12월31일자로 이곳 아파트 전기주임에서 잘린다. 내가 용역회사의 용원이니 아무런 힘이 없다. 사실 내 살이로 따지면야, 이 24,5년 되는 이 낡은 아파트에 비해 대궐 같은 아파트를 한 채도 아닌 두 채를 소유하고 있으며, 800여 평의 농토도 가졌으니 ‘턱도 없는 슈퍼갑질’의 그 사내의 살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건강이 아니 좋아 공기 좋은 이 아파트에 요양차 왔다고 떠벌리는 그 사내. 내 동생뻘 되는 이가, 하는 짓이라고는 ... 위아래 없이 쌍욕을 입에 담고 사는 게 한 녘으로는 측은하기만 하다.
무엇보다도, 나는 힘없는 용역회사의 힘없는 용원에 지나지 않지만, 저 스위스의 <빈사의 사자상>의 786명 가운데 하나의 넋은 아니다. 그러니.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도 부디 안심하시길. 님들 곁에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수필작가가 늘 건재하니까. 아울러, 나는 ‘노스탤지어’에 시달리지도 않을뿐더러 후회 같은 것도 없다.
작가의 말)
종일토록 글감을 못 챙겨 무기력했으나, ‘노스탤지어’라는 어휘 하나를 붙들고 끈덕지게 파고들다가 보니, 이런 글이 나왔다.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오늘도 그냥 아니 넘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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