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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둔 골에는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내가 성당 교우(敎友)인 그분한테 공연한 하소연을 했던 거 같다.
“형님, 나오셨습니까?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 저는 12월 31일자로 이 아파트 전기주임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서로 다니는 성당은 달라도, 교우들끼리는 ‘형님’ 또는 ‘자매님’으로 부르곤 한다. 존칭이며 서로 친밀감을 나타낸다.
그랬더니, 그분은 내가 재계약 내지 계약 연장을 아니 한 걸 안타깝게 받아들였다. 한 때 입주자 대표회의 ‘동(棟) 대표’였으며 인품 등으로 영향력이 꽤 크다는 그분. 나는 고자질 아닌 고자질을 그분께 다 하였다. 평소 그분과 가까이 지내는(?) 어떤 악질적인 입주민이 용역회사 소속인 우리를 못살게 굴었고, 나를 곤경에 빠뜨려 ‘사람 바꾸라’라고 압력까지 행사했노라고.
그런데 돌아오는 이야기가 영 시원찮았다. 해서, 내가 불쑥 대거리를 하고 말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하던데, 괜히 제가 말을 꺼냈네요.”
그 말을 듣던 그분은 나한테 크게 꾸지람을 하였고, 나는 이내 사과를 드리긴 했지만... .
참말로, 우리네는 ‘가재는 게 편이다.’는 속담을 자주 쓰게 된다. 실제로 ‘가재’와 ‘게’는 비슷한 점이 더러 있다고 알려져 있다. 둘 다 집게발이 있는 점, 등딱지가 딱딱한 점, 비슷한 모습으로 기어가는 점 등. 이처럼 비슷한 부류끼리 같이 편들어 줄 때 쓰는 말 가운데에는 ‘유유상종(類類相從)’도 있다. 또, ‘초록동색(草綠同色)’이란 말도 있다. 풀색[草色]과 녹색(綠色)이 합쳐져 ‘초록’이 되었으니... . 이 초록동색이란 말은, 고전 ‘춘향전’에 적절하게 쓰였다. 이몽룡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춘향에게 짐짓 말을 건 데서 출발한다.
“나는 지나가는 어사이니, 내 청(請)도 거절하겠느냐?”
그러자 춘향이 단호하게 대답한다.
“ 초록은 동색이요,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양반들은 다 똑같은가 보우! 차라리 내 목을 베시오.”
이밖에도 두둔하는 말이 든 속담 가운데에는 아주 좋은 게 있다. ‘자식 둔 골(곳)에는 호랑이도 두남둔다.’가 바로 그것이다. 이 속담에 쓰인 ‘두남두다’는 ‘편든다’는 뜻이지만, 이 속담에만 한정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이 속담은, ‘자식 가진 부모는 남한테 큰소리를 못 친다.’가 겹쳐지기도 한다. 이녁 자식도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 남들한테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을 지녔으니... . 이 속담, ‘자식 둔 골에는 호랑이도 두남둔다.’야말로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거나 ‘팔은 안쪽으로 굽는다’거나 하는 말과 겹쳐지는 점이 많다.
그렇더라도 벌써 오래 전, 남도 아닌 내 집안에서 그런 이유로 아주 불미스런 일이 생긴 적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나의 백씨(伯氏)가 그러한 수준의 인물인 줄을 꿈에도 상상 못했다.
“ 이 눔의 새끼들, 내 죽는 꼴 볼래?”
사건은 이러했다. 명절이었고, 군대생활을 하던 장조카(長-조카)도 마지막 비공식 휴가를 얻어나와 있었다. 그의 애인은 고무신 거꾸로 신고 달아났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술좌석에서 숙질간(叔姪間)에 언쟁 아닌 언쟁이 발생했다. 나는 작은애비 자격으로, 나의 쓰라린 경험담을 기초로 충고를 해주었다.
“조카, 사실 자네가 대학입학 3수까지 하게 된 데는 그 아가씨의 악영향도 있었을 걸세. 그러니 이젠 다 잊어버리고, 이를 악물고 대학에 다시 도전해보게나.”
그러자 조카는 이런 저런 걸로 트집을 잡으며나를 포함한 작은애비들한테 ‘올올’ 대들었다. 그러자 내 바로 위의 형이 조카를 크게 나무랐다. 둘은 급기야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건넌방에서 초저녁잠을 자던 백씨가 깨어나, 우리한테 와서 내지른 소리가 바로 “내 죽는 꼴 볼래?” 였다.
그길로 내 바로 위의 형은 자기가 몰고 왔던 승용차에서 선물꾸러미를 내려놓고, 자기 집으로 가족들을 강제로 태워 곧바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그 이후 동기간(同氣間)에 담을 완전히 쌓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이 눔의 새끼, 아재비는 부모맞잡이이거늘, 어디 대고 ... .” 하면서 당신 새끼의 뺨을 두꺼비 같은 손으로 때렸어야 옳았거늘... . 물론, 군대생활을 하며 실연까지 당한 아들이 탈영이라도 할세라, 두려움도 한 가닥 있었겠지만, 참말로 미욱한 처사였다. 돌이켜본즉, 내 백씨야말로 ‘자식 둔 골(곳)에는 호랑이도 두남둔다.’그 일차원에만 머물렀던 인물이다. 속마음이야 어떻든 당신의 자식부터 혼내주었어야 옳았다. 내 아이들과 내 중씨(仲氏)의 아이들과 내 계씨(季氏)의 아이들이 다 보는 가운데에서 내 백씨는 당신 아들만 그렇게 감싸들려 했으니... . 물론, 내 바로 위의 형이 고향 발길을 아주 끊은 데는 그밖의 복잡한 사정도 있었겠지만, 아직도 그 일은 유감이다.
나도 인간인지라, 살아오는 동안 지연(地緣)·학연(學緣)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어느 정도껏 해야 옳다. 동기간(同氣間)에도 남들이야 어떻게 하든, 내 기본 도리만 하면 될 일. 나는 명절에 고향을 갈 형편이 못되면, 전화 한 통이라도 드리는 편이다. 격일제 아파트 경비, 아파트 전기주임이 핑계거리가 잘도 되었던 거 같고.
지금 내 각오는, ‘자식 둔 골(곳)에는 호랑이도 두남둔다.’에 머무르지 말고, ‘수구초심(首丘初心)’이어야겠다는 거. 여우도 죽을 때에는 자기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했는데, 하물며 인간인 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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