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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제 수필작품만 읽는다는 어느 여성 애독자가 아침에 격려 전화 왔데요.
"선생님, 아마도 주님께서 작가인 선생님을 너무나 아기시는 나머지 한 자리에 두시지 않으시려는 것 같아요."
그의 말은, 한 자리에서 글감이 달릴세라, 주님께서 새로운 곳으로 안내하시곤 한다는... .
또 한 녘으로 생각하면, '매너리즘'에 빠질세라, 주님께서 저를 아끼시어 새로운 곳으로 무대를 옮겨주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 순종해야지요.
그리고 아름다운 꿈들 꾸세요.
꽃놀이패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
오늘 아침, 평소처럼 승용차를 몰아 40여 분 걸려 출근하는 동안 내내 생각한 게 있다.
‘지금 나야말로 바둑판에서 일컫는 ‘꽃놀이패’인 걸!’
흔히들 어려움에 처할 적에는 마음 비우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1년 고용계약으로 어느 아파트 전기주임으로 재취업해 있는 나. 오는 12월 31일이면 계약만료가 되나, 내심 내 ‘성실했음’으로 하여 ‘갑’으로부터 계약연장 내지 재계약이 허락될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어느 악질적인 입주민의 헐뜯음으로 인해 나는 계약만료 통지를 받고 말았다. 며칠 동안은 그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혔으며, ‘인인성사(因人成事)’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인인성사란, ‘혼자서가 아닌, 타인과 관계로 말미암아 일이 이뤄짐’을 뜻한다. 그 괘씸하기 짝이 없던 이가 오히려 고맙게 여겨지는 게 또 어인 일인지.
사실 정부로부터 향후 5개월 동안 월 150만원씩 실직급여를 받을 수 있다. 그러니 서두르지 않고, 조건 좋은 아파트 경비원 자리가 나오면, 그때 가서 골라서 재취업해도 된다. 세상은 넓고 아파트는 많으며 일할 자리는 참으로 많다. 새로 들어서는 아파트도 많으니... . 내년도 최저임금이 대폭 인상되어, 아파트 경비원 월 급여는 200만원 내외로까지 치솟는다. 하더라도, 월 실직급여 150만원을 감안하면, 굳이 서둘러 재취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함에도 나는 어제 어느 아파트 경비원 모집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들고 가서 면접을 받았다. 합격 여부는 아직 그 끝을 두고 보아야할 테지만, 느낌은 일단 좋다. 내 ‘만돌이농장’에서 승용차로 15분여밖에 걸리지 않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자리한 아파트로서, 승용차 연료비며 이동에 따르는 소요시간이며 맞교대시간이 새벽 6시인 점이며 여러 여건을 감안하면, ‘겉보기 임금’이 나은 전기주임으로 지내는 지금보다 오히려 실속이 나을 수 있다. 반면, 전기주임들의 교대시간은 아침 9시이고, 출퇴근 거리가 4,50분 걸리는 등으로 비번인 이튿날은 하루 종일이 아닌 반나절 농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농사와 직장생활을 격일제로 번갈아 하는 나로서는 한 해 동안 늘 시간에 쫓기다시피 했다.
다시 이야기하거니와, 셈을 해보면, 이곳에서 전기주임으로 계속 근무하느니보다는 내 농장과 지척(咫尺)의 거리에 자리한 그 아파트 경비원 자리가 오히려 낫다. 합격하여 새해 1월 1일부터 근무하게 되어도 좋고, 불합격하여 다른 일자리를 구할 동안 5개월여 실직급여를 받아도 좋다. 그러니 내가 어제 그 아파트 경비원에 응모한 것은, 결코 ‘건곤일척(乾坤一擲)’이 아니다. 오히려 ‘에멜무지(로)’가 어울린다. ‘에멜무지(로)’란, ‘헛일 하는 셈치고 시험삼아’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며, ‘단단하게 묶지 아니 한 모양’의 뜻도 지녔다. 참말로, 나는 어제 에멜무지로 면접을 받은 것이다.
나는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선임병으로부터 바둑의 기초를 배운 바 있다. 그 가운데에는 ‘꽃놀이패’도 있었고, ‘축(逐)’도 있었으며, ‘자충(自充)’도 있었다. ‘꽃놀이패’란, 패(覇)를 만드는 쪽의 입장에서는 패를 이기거나 지거나 큰 상관이 없으나, 상대편에서는 패의 성패에 따라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는 패를 일컫는다. 꽃놀이패야말로 이미 위에서 말한 ‘에멜무지(로)’와 통한다. 어제 면접 본 아파트 경비원에 합격통지를 받아도 좋고, 아니 받아도 좋은 게 바로 꽃놀이패라는 거. 그리고 나를 모함한 그 악질적인 입주자는, 양심의 가책이나 입주민들의 비난이나 내가 두고 갈 직장동료들의 손가락질 등을 당할 패. ‘축’이란, 상대방의 활로가 두개일 때 계속 단수쳐 나가다 보면, 상대방의 돌이 사다리모양으로 내몰리게 되어 결국은 잡게 되는 기술을 일컫는다. 이 ‘축’은 장기놀이의 ‘외통수(외通手)’와도 통한다. 외통수란, 상대편이 장군을 불렀을 때에 ‘궁(宮)’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는 수(手)를 일컫는다. 하여간, 그 악질 같은 입주자야말로 내 바둑의 활로를 ‘축’으로 몰고 있다고 쾌재를 불렀을 터.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분 드럽게(?) 좋게도 축이 아닌 꽃놀이패로 이어졌다는 사실. 바둑의 격언 가운데에는 ‘축 모르고 바둑 두지 말라.’가 엄연히 있건만... . 자충이란, 상대의 호구(虎口) 자리에 돌을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집어넣는 걸 이른다. 자충 내지 자충수는 ‘자기 무덤 스스로 파기’와 통한다. 내가 그에게 참소리를, 그것도 낮은 톤으로 한 게 끝끝내 자충수로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굳게 믿는다. 노자(老子)의 가르침 가운데에는, ‘하늘 그물망은 성글어도 빠뜨리는 게 없다 ( 天網恢恢 疎而不失 :천망회회소이불실).’가 분명히 있다. 죄는 죄 대로 물은 물 대로이니, 그는 벌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꽃놀이패는 이기면 큰 이익을 얻고, 져도 부담이 가벼운 패. 돌의 생사가 달려 있거나 큰 타격을 입게 되는 상대방과 상반된 조건하에서 마치 ‘봄철에 꽃놀이’하는 기분으로 싸울 수 있게 된 패.
내가 이 엄동설한에 때 아니게 ‘꽃놀이’를 즐기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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