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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죄하며 산 이들
    수필/신작 2018. 3. 20. 07:51

    속죄(贖罪)하며 산 이들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오늘은 마침 단군 이래 가장 악질적인 이 나라 지도자가 구속영장 청구가 된 날이다. 그는 한국 국적의 애비와 그 애비의 일본인 첩 사이에 태어난 이다. 나는 이 나라 사법정의가 바로 서기를,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와는 달리, 자기 조부(祖父)의 허물과 자기 부친의 반역을 한 평생 기워 갚고속죄하며 산 위인(偉人)이 둘 있으니... .


     


    1. 김병연[金炳淵,蘭皐(난고), 김삿갓 ]


     


      그는 이승에서 누린 나이가 56세인 조선 후기방랑시인이다. 1807(순조 7)1863(철종 14). 그에게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하는 다음(Dau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적힌 내용을 거의 그대로 베껴다 부치겠다.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김안근(金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조롱하는 시제(詩題)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김병연이 전라도 지역을 유랑하다가 동복(同福: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땅에 이르러 쓰러졌는데,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뒤 김병연은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돌아와 1863(철종 14) 5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김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畫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조부를 욕되이 한 과거시험 급제로 말미암아, 방랑시인이 되어 속죄의 생을 살다가 간 것만은 분명하다.


     


    2. 우장춘(禹長春, 1898~1959)


      그는 이 글 허두(虛頭)에 소개한 그 어떤 인물과 출생비밀은 비슷하다. 이 글 허두에 소개한 이는, 어느 남자가 살이가 힘들어 일본으로 건너가 남의 집 머슴으로 지내다가 일본인 첩을 얻어 낳은, 첩의 아들이었던 데 비해, 우장춘의 출생비밀은 더욱 기가 막힌다. 그는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주동이었던 무신(武臣) 우범선(禹範善)과 일본인 아내 사이에 태어났다는 거 아닌가. 사실 그의 부친은 우국지사(憂國之士)들로부터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아들 둘을 어느 스님한테 맡겨 키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 ‘1’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다음 백과에서 죄다 베껴다 붙이겠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廣島]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 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연구 업적은 1926종자(種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있는데, 초기에는 나팔꽃이나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 냈다.


      그는 이어서 유채(油菜)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현존종(現存種)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종의 합성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 이 연구에서 학리적으로 밝힌 점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에 수정과 보충을 가한 것이다. ,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945년에 발표된 채소의 육종기술은 그의 오랜 연구와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결론이며, 이 논문에서 말한 예언이 현재 성공적으로 대부분 실용화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뒤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국내 업적으로 큰 것을 들면,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 해결 외에 무균종서(無菌種薯)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사망 전에는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가 19598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尹日善)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麗妓山)에 안장하였다. 매년 8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


     


      내가, 명색이 임학도였던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그의 업적을 다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홑피튜니아가 아닌겹피튜니아육종, 무균(無菌)의 감자를 강원도에 심을 것을 권장, 제주도에 감귤을 심으면 좋겠다고 정부에 권장, 엇갈이배추가 아닌 알찬배추보급 등등.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일본식 이름으로 논문 등을 발표했으나, 그 이름 앞에는 자기의 성() ‘()’를 끝끝내 고집했다는 거. 사실 자기 자녀들 성은 스나가로 썼으면서도... 더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명언 가운데에 이런 게 있다는 점.


    길가의 민들레는 밟아도 피어난다.”


      성장하는 동안, 자기 어머니로부터 부친의 전력(前歷)을 들었을 터. 조국에 대해 자기 부친이 지은 죄를 속죄하는 맘으로 말년을 맞았던 게 분명하다. 그는 기워 갚고자그 많은 업적을 남겼던 거 같다.


      다시 나의 이야기는 한 때 우리나라를 다스렸던 그 몹쓸 인간한테로 돌아간다. 그는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감옥에 갈 때까지 사기 친 이다. 아마도 저승에 가서도 사기칠 위인이다. 단군 이래 그처럼 악랄한 이는 없을 것이다. 돈에 환장 들린, 게걸스런 인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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