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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마’를 타며
윤근택(수필작가/ 문장치료사/ 수필평론가)
모름지기, 농부는 ‘가르마’의 개념을 잘 알아야 하고, 또 가르마를 잘 탈 줄 알아야 한다. 이 무슨 소리? 농사를 수도작(水稻作), 전작(田作)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을 텐데, 전자(前者)는 논의 언저리에 여하히 두둑을 튼튼히 지어 물을 항시 가두어두느냐가 요체이고, 후자는 밭의 둘레에 도랑을 얼마가 깊이 잘 내느냐가 핵심이다. 대체로, 과수(果樹)를 비롯한 밭작물들은 배수(排水)가 잘 이뤄지지 않으면, 그 뿌리들이 호흡곤란으로 생명활동을 멈추게 되고, 결국은 말라죽는 일이 왕왕 있다. 작물에 따라 침수 허용시간 즉 요즘 흔히 쓰는 ‘골든타임’이 있기 마련이다. 고추의 경우, 24시간이 골든타임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남이 잦은 침수(沈水)로 말미암아 버려뒀던 두 댁 밭 두 뙈기를, 수년째 거저 얻어 부치고 있다. 내가 가르마의 이치를 너무도 잘 알고 실천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관리기에다 이른바 ‘구굴기(溝掘器) 날’을 끼우고, 밭 둘레에 도랑을 깊이 내는 한편 물이 생기는 밭자리에다 가르마를 탄다. 내 어머니는 살아생전 면경(面鏡)을 들여다보며 참빗으로 가르마를 타서, 쪽진머리를 하곤 하였다. 그런 다음, 당신은 아주까리 기름을 머리에 반질반질 바르곤 하였다. 어쨌든, 나도 가르마 꼴의 도랑도 만들어대기에 밭농사를 멀쩡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세상이 좋아져서, 그러한 곳에다 지날 날에 설치했던 ‘암거(暗渠)’ 대신 ‘PVC 유공관(有孔管)’을 설치해도 만판이다. 또, ‘흄(Hume)’ 형제가 발명했다 하여 이름 붙인 ‘흄관’을 매설해도 된다. 크게 과수를 재배하는 농가에서는 통기(通氣)와 원활한 배수(排水)를 위해 과원(果園)에 요즘은‘PVC유공관’을 묻는 추세다.
다시 내 이야기다.
“윤 과장(나의 택호), 우리 밭은 물이 생겨서 농사가 도통 안 되더군. 그러니 윤 과장이 재주껏 해서 거저 부치시게나.”
다시 말하거니와, 살아생전 내 어머니의 가르마를 떠올렸기에 흔쾌히 수락하였다. 밭에도 당신의 머리모양으로 가르마를 타면 되리라 믿었기에. 나한테 그러한 밭을 거저 부치라고 한 분들은 내심 약이 오르겠지만... . 사실 나는 밭에다 가르마를 타되, 내 어머니 머리처럼 정중앙을 잡아 곧게 타는 것만은 아니다. 비가 내린 후 밭을 유심히 살펴보아, 추진 곳을 요리조리 찾아‘곡선가르마’로 내게 된다. 이야말로 ‘신세대 곡선가르마’ 패션이다. 생긴 대로, 자연에 순응하는 곡선 가르마.
새봄을 맞은 나는 관리기로 밭을 간다. 그런 다음 밭 둘레 도랑도 고친다. 그리고 밭의 추진 곳을 찾아 ‘곡선가르마’를 탄다. 가르마를 타지만, 언제고 그랬듯, 끝마무리는 호퍼괭이나 삽인 아닌 ‘레이크’나 ‘철사 갈퀴’로 행할 것이다. 오랜 경험상, 도랑을 마무리 짓는 데는 ‘레이크’나 갈퀴보다 힘이 덜 들고 효과적인 농기구는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이참에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 덤으로 알려드릴 게 있다. 유목(幼木)을 심을 때에도 삽이나 곡괭이나 괭이보다는 호미가 낫더라는 거.
밭에다 ‘가르마’를 짓는 동안, 살아생전 내 어머니가 다시 그리울 줄이야! 당신은 해마다 밭 언저리에다 아주까리를 심었고, 그 아주까리 열매로 기름을 짜서 당신의 머릿기름으로, 등잔기름으로 쓰곤 하였다. 당신은 아주까리 열매를 딸 적마다 ‘강원도 아리랑’도 구성지게 부르곤 하였다.
‘...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마라/ 누구를 괴자고(사랑하자고) 머리에 기름/ 열라는 콩 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 ... ’
나도 당신이 부르던 그 소절을 거듭거듭 부르며 밭에다 가르마를 타리. 가르마들 타되, ‘곡선가르마’를 타리. ‘곡선 가르마’를 타되, 굳이 하나의 가르마마 고집하지 않으리. 당신은 머리 정중앙에 곧게, 그리고 좁게, 머릿밑이 하얗게 외길처럼 보이던 가르마를 탔더라도... .
작가의 말)
졸속으로 지었으니, 애독자들께서는 채워서 읽어주시길. 하더라도,‘밭 : 어머니의 머리 = 도랑 : 가르마’만은 제가 생각해도 놀라운 발견(?)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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