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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잎을 보다가
윤요셉 (수필가/수필평론가)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미물(微物) 하나에도 경이로움과 경외감(敬畏感)을 느낄 때가 참으로 많다. 초여름의 이 이른 아침, 우물가 도랑에 서 있는 토란의 잎들을 들여다 보다가도 새삼 놀라게 된다. 홱 뒤집힌 우산지붕 같이 생겨먹은 잎사귀들. 아니, 방패같이 생긴 잎사귀들. 하나같이 이슬방울이 맺혀 있다. 나는 금세 어린아이로 돌아가, 토란잎을 요리조리 움직여 본다. 탄복할 일이다. 이슬방울이 또르르또르르 구른다.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소리’라고들 말하던데, 나야말로 토란잎에 이슬방울 구르는 소리가 막 들리는 듯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토란잎은 연잎과 더불어 아주 특별한 구조다. 물기가 전혀 스며들지 않는다. 방수(防水)가 뛰어나다. 대신, 떨어진 이슬 알갱이가 한 데 모여, 굵은 이슬방울이 되어 잎의 낯짝을 요리조리 쏘다니도록 한다. 숫제, 잎은 이슬마사지를 받는다.
‘토란은 왜 그 많은 잎꼴을 두고, 그러한 형태의 잎을 취했을까? ’
사실 이처럼 어리석은 듯한 궁금증이 언제고 진실의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가 된다. 내가 유추해낸 그 해답은 이 글 저 아래에 가서나 알려드리기로 하련다. 우선은, 농땡이 가운데서도 상농땡이(上-)인 토란의 습성부터 살짝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겨우내 관리하던 알토란을 도랑가든 수채든 축축한 곳에다 해마다 심게 된다. ‘토란’이란 이름은 ‘土卵’ 즉 ‘흙 속의 알’에서 왔단다. 또, ‘토련(土蓮)’으로 부르기도 한단다. 이 어휘 자체만으로도, 연(蓮)과 마찬가지로 식용성과 약효성이 뛰어남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아울러, 토란과 연의 유사성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데 그렇게 심은 알토란이 금세 싹을 틔우는 법이 없다. 온갖 잡초들이 다투어 자람에도, 토란은 그렇게 굼뜰 수가 없다. 나는 몇 해 동안 조바심을 부린 바 있다. 지난 해 이웃 할머니인 현경이 모친이 토란 촉 틔우는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었다. 그분 말마따나, 보리가 팰 때에 가서야 토란은 비로소 촉을 틔운다. 알토란에서 줄기와 잎이 바로 나온다. 꼬깃꼬깃 말려 있던 잎이, 그 질퍽한 땅거죽을 뚫고 올라오면서 펼쳐진다. 사실 나는 (꽃이나 잎이) ‘피다’ 와 ‘펴다’는 그 어원(語原)도 같으며 동의어라고 믿고 지낸다. 겨우내 꽃눈이나 잎눈 속에 이미 꼬깃꼬깃 말아 두었던 꽃과 잎을 ‘펴는’ 것이니! 아무튼, 토란은 식물들 가운데 농땡이다.
토란잎은 연잎과 더불어 여러 엽저(葉底;잎 아랫부분) 모형 가운데 순형(楯形; 방패꼴)을 취한다. 지난날 대학시절 수목학에서 어렵게 익힌 엽저 모형에는 이밖에도 유저·설저·예저·둔저·왜저·원저·평저·이저·심장저·관천저·극저 등이 있다. 나는 그 많은 잎 아랫부분 모양 가운데서도 ‘관천저(貫穿底;잎줄기에다 마치 엽전을 꿰듯, 잎 중앙을 꿰어 놓은 듯한 꼴)’를 가장 신비스럽게 느낀다. 식물 종류마다 잎 아랫부분의 모양도 다르고, 잎 가장자리의 모양도 다르고, 엽맥(葉脈)도 다르고, 그 기능들도 각각 다르다. 그러한 걸 학문의 한 분야라고 여겨 익히자면, 얼마나 어렵고 수고스러운지 모른다. 하지만, 이파리 한 장마저도 그처럼 천태만상(千態萬象)이며 예술품이라고 여기며 관찰하다가 보면, 하루하루 살맛이 더해진다. 참말로, 한 장의 이파리마저도 허투루 볼 게 못 된다. 예술품이라도 그렇듯 훌륭한 예술품은 없다. 그런 면에서도 수필작가가 되기에 앞서,여타 학문이 아닌, 수목학을 익힌 게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번에는 밤이면 포개서 자는 잎들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잎자루를 중심으로, 좌우의 잎들이 일제히 쌍을 이뤄 포개서 자는 식물이 있다. 대표적인 식물이 바로 자귀나무다. 겉보기엔 아까시나무 잎 같지만, 아까시나무 잎이 기수우상복엽(奇數羽狀複葉; 홀수를 이룬 깃털 모양의 여러 잎)인데 비해, 자귀나무의 잎은 우수우상복엽(偶數 羽狀複葉 ;짝수를 이룬 깃털 모양의 여러 잎)이다. 아까시나무 잎은 따로 정엽(頂葉;꼭대기 잎)이 있으나, 자귀나무는 그것이 없어 짝수다. 그러기에 외톨박이로 남는 잎 전혀 없이 일제히 짝을 이뤄 포개서 잘 수 있다. 부부간의 금실(琴瑟)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 신혼부부의 정원에 심는 나무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수목학을 강의하셨던 나의 은사님은 ‘자귀-‘가 아닌 ‘자기(sleeping)-‘가 온당하다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사랑초는 한 장 한 장의 잎을 마치 종이를 접 듯하여 잔다. 내가 최근에 관찰해본 바, 세잎클로버처럼 생긴 그 작은 ‘괭이풀’의 잎들도 밤마다 사랑초 잎처럼 낱낱이 포개서 자곤 하였다. 또, 명아주의 잎들도 밤마다 접고 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미루어 두었던, 토란잎의 비밀을 풀 차례가 된 듯하다. 미리 말하건대, 수렁에서 핀 잎이기에 자신을 정화(淨化)코자 그런 꼴이 아닐까 하고서. 수렁에서 잎을 피우는 점은 연꽃의 잎도 마찬가지다. 이미 위에서 이들 두 식물의 잎은 방패꼴이고, 방수가 잘 되며, 뒤집힌 우산꼴이고, 작은 이슬방울을 모아 굵은 이슬방울로 만든 후 자기 낯짝을 이슬마사지 한다고 다 적어두었다. 이들 두 종류의 잎 표면에 왁스성분이 있어 방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매우 미세한 털이 한 방향으로 자라나 있다고 한다. 연꽃의 잎은 이중구조로까지 되어 있단다. 물론 우리가 맨눈으로는 알아볼 길 없으리만치 자잘한 털이다. 물 입자보다 작은 이 미세한 털들이 모여 있어, 그 사이에 물방울이 얹히게 된단다. 마치 섬모운동(腺毛運動)을 하듯 하여 물방울이 데굴데굴 잎 표면에 굴러다니도록 되어 있다. 왜 토란과 연은 그러한 구조를 지니게 되었을까? 둘 다 수렁에서 자라는 식물이다. 물이 좋아 물 곁에서 살지만, 한 녘으로는 진력이 날 법도 하다. 필요 이상의 물기를 더는 체내로 스며들지 않게 하기 위함은 아닐까? 보다는, 더러운 물이 온몸에 묻는 걸 극도로 싫어할는지도 모를 일. 발은 비록 수렁에 담그고 있지만, 저 천상(天上)을 향한 파란 꿈만은 다칠 수 없다는 본능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나아가서, 뒤집힌 우산처럼 생긴 잎사귀를 세숫대야 삼아 수정처럼 맑디맑은 밤이슬을 받아 모은다는 거. 그렇게 이슬방울을 동그랗게 키워 물양치질을 하고, 세안(洗眼)을 하고, 우산 삼아 줄기가 비 맞는 걸 막아주는 등 언제고 청초한 모습으로 지내고자 한다는 거 갸륵하기만 하다. 꼭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꽃의 미덕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좋을 성싶다.
요컨대, 토란의 잎과 연꽃의 잎은 그들 삶의 지혜가 이슬 알갱이처럼 응축된 곳이다. 이처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생명체를 내시되, 사전 설계에 의해 그 생명체에게 적합한 ‘맞춤형 서비스’를 하셨다. 그러니 나는 작은 사물 하나라도 허투루 보거나 하찮게 여겨서는 아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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