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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觀察)’에 관해(1)수필/신작 2026. 1. 2. 14:56
‘관찰(觀察)’에 관해(1)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인트로(Intro)
잠시. 나의 일상을 소개하고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24시간 격일제 근무 후 새벽에 퇴근하여, 가족이 사는 경산 시내 아파트에서, 아내가 차려주는 된장찌개 반찬의 아침밥을 먹고 곧바로 길을 나서곤 한다. 아파트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경산시장 앞 버스 승강장에 내려, ‘남천1 시내버스’로 갈아탄다. 30여 분 그렇게 오다보면, ‘송백1리 시내버스 승강장’에 당도한다. 마을 초입에서 다시 1.2km 산길을 걸어오면, 그제야 내 ‘만돌이농장’이 나타난다. 한갓진 산 속 외딴집. 이곳 농막은 내 신성한(?) 창작실이다. 고맙게끔 일찍이 내 친정 회사 ‘KT’가 초고속인터넷망을 깔아주어, 독자님들과 소통은 아주 원활하다. 2년 여 전 예기치 않았던 교통사고를 일으켜, 애마 ‘50조 9115 투싼’을 폐차하고 난 이후 운전을 아예 포기하였다. 때로는 불편한 점 없지 않지만, ‘새옹지마’, 썩 잘된 일이다. 나이 칠십에 이르고 보니, 그리 바삐 다닐 일도 없어진데다가, 시내버스 차창 밖 사물들도 잔잔한 맘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산길 1.2km를 걷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풀들을 관찰하면서 글감 갈무리를 할 수도 있게 되었고. 기왕지사 작가인 터에, ‘이러한 축복이, 이러한 특혜가, 이러한 여유가?’
곧바로 데스크 탑 컴퓨터의 전원을 ‘ON’한 다음, 귀환(歸還)에 따르는 의식(儀式)을 치르기라도 하듯, 막걸리 한 사발부터 들이킨다. 물론 한 편의 글을 적는 동안에도 중간중간 750ml짜리 막걸리통 세 개 정도는 늘 비우지만... .그 다음 의식은 먼지 끼거나 성에 낀 돋보기의 알 닦기. 이 또한 사물을 제대로‘관찰’하기 위함이라고 해두자. 그런 다음에 비로소 나의 개인 ‘티스토리’인 ‘이슬아지’를 열어, 내가 하루 이 컴퓨터에서 떠나 있던 동안(현재 직장이 격일제 근무인 관계로.) 나의 작품들을 읽고, ‘댓글’을 달아둔 분들께 감사의‘답글’부터 달아드린다. 이 또한 내가 본론에서 다룰‘관찰’에 해당한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
관찰
그처럼 댓글을 단 분들의 글 수준과 교양 수준은 글쓴이인 나의 글을 언제고 능가한다. 그 댓글들 가운데에서 종종 마주치는 문장 하나.
‘당신의 글들은 정말 흥미롭고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해줍니다.’
때로는 그 문장이 정형화 내지 규격화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분들이 쓰는, 그 격이 높은‘통찰력’이란 낱말 하나가 나더러 영감을 불러일으켜, 앞으로 수편의 연작수필을 적게 만들 것 같은 예감.
통찰력(洞察力,insight)이라니?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일컫지 않는가. 꽤나 고급스런 말로서, ‘관찰(觀察)’보다는 격이 높은 말임에 틀림없다. 관찰은, ‘사물의 현상이나 동태 따위를 주의하여 잘 살펴봄’을 일컫는데 비해서.
사실 오래 전부터 독자님들께서 그렇게 종종 단 댓글에 쓰인 ‘통찰’이란 어휘가 매력이라고 생각해 오고는 있었다. 하더라도, 내가 적어온 그 많은 수필작품들은 ‘통찰’의 산물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부족하다. 그저‘관찰’ 수준에 머문다는 것을. 막상 그 행위가‘관찰’이라고 말해놓고 보니,‘관찰’을 얕잡아 부른 듯하다. 관찰도 얼마나 대단한데? ‘주의하여 찬찬히 살펴보는 행위’를 이르는 어휘이니까.
나는 관찰력이 아주 빼어났던 아이를 기억한다. 내가 2019.1.30.에 본인의 블로그(현재 ‘티스토리’의 전신)에 올렸던 작품,‘에드몬드 알비우스(Edmond Albius)의 손짓’의 작중인물이다. 그 글 부분부분을 따다 붙이겠다.
<(상략)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19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부르봉 지방, 레유니온(Réunion) 섬 어느 백인 댁에 ‘에드몬드 알비우스’란 12살짜리 흑인노예가 살았다. 그는 또래인 주인댁 아이에게 손짓하며 가까이 와 보라고 하였다.
“주인님, 내가 손으로 수분(受粉)하였던 이 바닐라에서 꽃이 폈어요.”
과연 그러했다.
(중략)그랬던 것이, 정확히 1841년. 그 ‘에드몬드 알비우스’의 손에 의해 인공수분에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바닐라꽃이 작은 잎사귀 속에 숨어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잎사귀를 젖혀 꽃을 찾고, 그 꽃의 수술대에서 꽃밥을 손으로 묻혀 암술머리에다 옮겨 묻힌 것이다. 손 대신, 대나무꼬챙이를 썼다는 설도 있다. 하여간, 그 꼬맹이 흑인노예의 인공수정 덕분에 바닐라 재배는 곧바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는 거 아닌가. 당시 욕심에 가득 찬 백인들은 그 소년의 기술을 강탈하고자 애썼으나, ‘에드몬드 알비우스’의 백인 주인은 끝까지 그의 기술을 지켜주었다는 점도 감동적이다. 뿐더러, 그 백인 주인은, 몇 해 아니 가서, 그 갸륵한 ‘에드몬드’한테 노예 신분의 사슬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이후 프랑스인들은, 그 노예 소년의 업적을 기려, 그 바닐라 인공수정 기술을 ‘에드몬드의 손짓’이라고 한단다. 정말 감동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거의 매일 맡다시피하고 즐기다시피하는 그 바닐라향은 꼬맹이 흑인노예의 손기술에서 비롯되었음을. 그 꼬맹이 흑인노예한테 경의를 표한다.(하략)>
‘에드몬드 알비우스’의 관찰력 덕분에, 우리는 바닐라향을 맘껏 즐길 수 있다.
인류 최초로 ‘천체 망원경’을 고안해낸 ‘요하네스 케플러(독일, 1571~1630)’도 ‘관찰의 대가’였던 셈. 그리고 내가 끼는 이 돋보기도 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물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위해 고안해냈을 테고, 네덜란드 ‘안토니 바 레벤후크(1632~1723)’가 고안해낸 현미경도 마찬가지로, ‘관찰’을 제대로 하고자 고안해낸 도구였다는 것을.
이 ‘觀察(관찰)’이 조선시대에 이르면,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바로 ‘관찰사(觀察使)’. 요즘 도지사에 해당하는 벼슬로서, 고려 창왕 때 ‘안찰사(按察使)’에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여기서 쓰인 ‘按’은 ‘조사하다’의 수직적이고 갑을관계의 의미를 지닌다. 물론, ‘按’보다는 ‘觀(살피다)’가 더 자애로운 어휘이다. 그 ‘관찰사’라는 직함이, 요즘의‘도지사’라는 직함보다 훨씬 빼어나다는 것을. 민초들의 애로사항 등을 ‘허리굽혀 경청하는’, 그야말로 ‘굽어살피는’수장(首長)의 모습을 함축하고 있지 않은가. 조선시대의 ‘관찰사’는 행정·군사·재정까지 다 거머쥐고 막강한 힘을 자랑하였다는데, 그 ‘觀察-’이 뜻하는 바, ‘굽어살피는(허리 굽혀 살피는, 허리 굽혀 경청하는)’애민사상(愛民思想)의 바탕 위에서 이름 붙여진 직함이었을 거라는... . 이참에 중앙정부에 건의하여 아니, 국민청원으로, 민선‘도지사’라는 직함을, 조선시대의 ‘관찰사’로 다시 바꾸자고 해볼까도 싶다.
다들 바삐 살아가는 현대인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날밤을 새며, 그 동안 내가 시내버스를 환승하여 이동하면서, 어느 아파트 경비실에서 24시간 근무하면서, 잠든 사이에도 관찰에 관찰을 거듭했던 이야기를 마저 적고는 싶지만... . 부득이, 독자님들 사정을 감안하여, 이 글을 시리즈물로 적을밖에.
끝으로, 나의 ‘티스토리’에 몰래몰래(?) 찾아와 댓글을 남기고 달아난(?) 애독자님들께 아주 크게 따지고자 한다.
“제 에너지가 ‘엥코(えんこ)’즉, ‘바닥이 나고’‘다 떨어져 가는데’계속 글 적으라고 부추기는 님은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하지만, 무척 사랑해요.”
차시 예고)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오안(五眼)’을 중심으로 적으려고 한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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