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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가 쓰는 <농학개론(農學槪論)>(73)
    수필/신작 2026. 1. 5. 23:49

     

       농부가 쓰는 <농학개론(農學槪論)>(73)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74. 유채(油菜)

     

       나는 해마다 겨울초입에 농막 아래 켠 밭에다, 그야말로 문전옥답(門前沃畓)에다 유채씨를 몇 이랑씩 뿌린다. 겨우내 파란 잎을 내어놓아 삭막함을 누그러뜨려 좋기도 하지만, 이른 봄에 는 그 잎들을 재료로 삼아 아내의 손길에 의해 김치를 담가먹을 수도 있어서 좋다. 그러다가 늦봄에는 노란 꽃을 피워 내 농장을 장식하기에도 만판이다. 일석삼조(一石三鳥).

       나의 유채에 관한 아련한 추억 한 자락. 중학교까지는 경북 청송 시골에서 지냈던 나. 대구에 소재한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당시 50대였던 내 어머니는 ‘밥바라지’ 핑계로 와 있었다. 당신은 봄이면 시장에서 ‘헬렐레’시든 유채를 사와서 김치를 담그곤 하였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어머니는 그렇게 담근 유채김치통을 물 다라에 담가, 저장기간을 연장하고자 나름대로 애썼다. 약간은 노랗게 익어 새콤했던 밥도둑 그 유채김치 맛을 여태 잊을 길 없다. 사실 반찬도 유채김치 정도에 그쳤으니... . 부추김치도 마찬가지였다. 약간은 떠서(?) 새콤한 맛을 지녀야 제대로 된 부추김치 맛이었다. ‘곰삭는다’는 말이 그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일까? 지금 내 아내 차 마리아님한테는 대단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유채김치의 참맛은 그것이거늘, 아내는 유채김치를 담그되, 김치냉장고에 이내 넣게 되는데, 그건 영 아니다.

       당시 내 어머니는 유채를, ‘시나나빠’로 불렀고, 자연스레 ‘시나나빠 김치’라고 불렀다. 이 글을 적기에 앞서 살펴본 바, ‘시나나빠’의 어원은 ‘시나(중국)’+ ‘나빠(잎 먹는 채소)’의 합성어라는 설이 있다는 것을. 지역에 따라서는 이 유채를 ‘하루나[はるな;春菜]’로 부르기도 하고, ‘겨울초’라고 부르기도 하며, ‘동초(冬草)’로도 부른다는 걸 알고 지낸다.

       이 유채에 관한 에피소드는 또 있다. 이곳 경산시 남천면 송백1리는 윗마을 신방리와 더불어 저 아랫녘 경산시를 관통하여 흐르는 남천(南川)의 지류(支流)이다. 저 아래 남천 천변까지 봄마다 숫제 유채꽃밭이 되는데... . 성당 다니기에 열심인 내 아내 차 마리아님의 대모(代母)인 ‘이 마리아님’께서는 평소처럼 순진무구하게시리, 엉터리 소문을 경산시내에 쫘악 퍼뜨렸다는 게 아닌가.

       “이 유채꽃밭은 남천면 송백1리에 사시는 윤 요셉(나의 세례명임) 형제님께서, 여름날 장마철에 유채씨앗을 한 가마니 풀어 떠내려 보낸 덕분으로 조성되었어요.”

       그분은 어련히 윤요셉 형제인 내가 그렇게 했으리라 믿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꿀벌을 키우는 내 이웃 ‘김 현경’이란 젊은이가, 밀원(蜜源)으로 삼고자 이스라엘에서 비싸게 사온 유채 씨앗 한 가마니를, 장마철 황톳물에다 쏟아부은 덕분이라는 점. 나는 그때 우의를 입고 우산을 쓰고서, 그의 그 엉뚱한(?) 작업을 곁에서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경산시 남천 천변뿐만이 아닌, 대구의 저 아랫녘 신천(新川) 천변까지 봄마다 유채꽃 동산이 된 것이다. 정작 그랬던 ‘김 현경’은 꿀벌 양봉을 접고 타지(他地)로 가버렸지만... . ‘김현경’, 그의 업적도 길이 추앙받을 일.

        이제 내 이야기는, 기왕에 제재로 삼은 ‘농학개론’에 걸맞게, 제주도와 거제도에 유채꽃이 들어온 내력을 소개할 차례. 유채꽃 육종은 우장춘(禹長春; 일본식 이름 스나가 나가하루, 1898~1959)박사의 그 많은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에서 하나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사실 우장춘 박사는, 조선말기 무신(武臣)이었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우범선(禹範善)’의 아들이다. 그의 부친 우범선은 그러한 큰일을 저지르고 일본으로 숨어가서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 의인에 의해 결국 그는 피살되었고, 어린 우장춘은 그길로 고아 신세가 되어 청년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이었지만... .

       잠시. 다소 글 길이가 길어지더라도, 인터넷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소개하는 대로 그분을 소개함이 좋겠다. 아래는 그 백과사전 내용을 그대로 따다붙인 것이다.

     

      <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廣島]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 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중략)

       그는 이어서 유채(油菜)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년「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현존종(現存種)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종의 합성’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즉,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이 연구에서 학리적으로 밝힌 점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에 수정과 보충을 가한 것이다. 즉,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945년에 발표된 「채소의 육종기술」은 그의 오랜 연구와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결론이며, 이 논문에서 말한 예언이 현재 성공적으로 대부분 실용화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뒤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하략)>

     

        유채와 관련해서, 그분의 업적을 정리하자면, 염색체수가 10개인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인 양배추를 교배하여 염색체 19개인 고유의 유채를 육종해내어, 제주도에 맨 처음으로 보급하였다는 점. 그분이 영구환국(1950년)하여 제주도에 밀원식물인 유채를 재배케 하기 이전인 1935년 일본에서, ‘십자화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는 점. 좀 더 좁혀서 말하자면, ‘유채의 육종 과정을 설명하시오’라는 중간고사 문제에다, ‘우장춘 박사가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하여 유채를 육종해내었고, 우리나라 제주도에 밀원식물로 보급하였다. 그밖에도 그분은 ‘겹페튜니아 육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로 답을 적으면 된다. 그러면 연세 지긋한 교수님들께서는 흐뭇해하시면서 ‘A+’ 주실밖에. 이 점은 40년 ~ 50년 내 후배농학도들한테 커닝페이퍼로 슬쩍 건네주는 것이니... . 물론, 20 여 년째 내 애독자로, 나의 그 숱한 수필폭탄에도 끝끝내 살아계시는 세계적인 콩박사 ‘두곡(豆谷) 정규화 박사님’께서도 지난날 내 은사님들처럼 그리 하실 듯. 즉, 기특해서 당신의 육종학 과목 중간고사에 그렇게 답을 적은 제자들한테 주저 않고‘A+’를 주셨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의 유채는 우장춘박사의 작품이다. 이 겨울 내 농장 문전옥답에 자라는 유채도 우장춘 박사가 육종해낸 유채의 후예들임이 분명하다.

        다소 지루했던 내 이야기. 정말로, 지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내 글 인내심 있게 읽어오신 독자님들께만 따로 드리는 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비싼 몸값을 일본정부에 치르고 우장춘 박사를 사왔다고 한다. 그 이후 우장춘 박사를 일본한테 도로 빼앗길세라, 그분 일본인 모친의 부고를 접하고도 문상을 못 가게 하였다고 한다. 자칫, 일본 당국의 장난질에 되돌아올 수 없을까봐서. 우장춘 박사는 상복을 입고, 마당에다 추모의 우물을 파고, 친필로‘자유천(慈乳泉)’이라고 적고 수시로 그 우물가에서 절을 하며 모친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그분의 명언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젊어서는 어머니의 나라 일본에, 나이 들어서는 아버지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봉사할 따름인 걸요.”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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