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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7)
    수필/미술 이야기 2014. 12. 19. 21:24

     

                             농부 수필가가 쓰는 미술 이야기(17)            

     

    ‐ 마                              -  마지막 연인의 초상화를 26점 이상 그린 화가-

     

     

     

     

     

                                                                                                                                                                               윤근택 (수필가/수필평론가)

     

     

     

       그에 관한 소문과 평판은 다양했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일으켰던 이, 당대 초고의 미남, 술과 마약과 결핵으로 심신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던 이, 인간 내면과 꿈으로 상승의지를 그린 독특한 화가, 당대의 풍운아,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한 영원한 보헤미안 ... .’

     

        1920년 1월 24일, 한 아름다운 남자가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입원 이틀 만에 죽었다. 14세 때부터 온갖 병으로 골골대다가, 16세 때부터는 폐결핵까지 앓아 한평생 고생했던 이. 그의 사인(死因)은 결핵으로 인한 뇌막염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에 불과했다.

     

       그가 대체 누굴까? 바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이탈리아, 1884~1920)’이다. 그는 유태계 양친한테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인해 살이가 다소 나빠지긴 했으나, 여전히 부르주아였다. 그의 어머니는 예술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일기장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어린아이의 영혼 속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잠자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예술가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온갖 병에 걸려 골골대다가 16세가 되면서부터 결핵까지 앓게 되자, 아들을 따뜻한 곳으로 요양을 보내게 된다. 그러했건만, 모딜리아니는 기질적(?)으로 이끌려서인지 ‘몽마르뜨’로 가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호텔 등지에서 생활하면서, 미술작가들과 문학작가들과 교류를 하게 된다. 그는 우아하고 위트가 넘치고 멋진 차림을 한 남자였다. 그랬기에 숱한 여인들이 자기가 모델이 되겠다며 꼴딱꼴딱 넘어가곤 하였다. 남자인 나도 인터넷에 올려 있는 그의 실물 사진에 반할 지경이었으니... . 그는 마약과 술과 방랑과 여성편력으로 몸이 쇠약해져 간다. 그러던 그가 32세일 적에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운명적인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는 그 소녀한테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녀는 우아한 자태, 잔잔한 미소, 기묘한 눈빛을 지닌 소녀였다.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는 소녀. 실은, 화가지망생 내지 화가였던 그녀도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카페에 찾아드는 모딜리아니를 먼발치에서 잔잔히 바라보곤 하였다. 그는 그 소녀한테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랑 고백 했을 것만 같다.

     

       “아가씨도 화가? 아니면 화가지망생? 나의 영원한 모델이 되어줄 수 없을까요?”

     

        모딜리아니보다 무려 14세가 적은 18세 소녀는 수줍음을 타며,그의 사랑고백을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소녀의 이름은 ‘잔느 에뷔테른느(Jeanne Hebuterne, 1898~1920)’. 그녀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고, 양친과 달리, 자못 개방적인 인물로 알려진다. 뒤에 따로 이야기 하겠지만, 그녀의 양친은 딸을 개방적인 미술학교에 보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인터넷에 올려 있는 그녀의 살아생전 실물사진을 보자니, 나도 꼴딱 반할 정도이다.

     

       1917년, 그들 둘은 지중해 연안 ‘코트라쥐르’라는 곳으로 이주하여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1918년 모딜리아니가 건강이 악화되자, ‘니스’로 옮겨가게 된다. 그해 겨울 첫딸을 낳게 된다. 모딜리아니는 딸아이까지 얻게 되자, 모처럼 정신적 안정을 찾아, 연인이자 모델인 ‘잔느’의 초상화를 폭발적으로 그리게 된다. 그렇게 해서 그린 잔느의 초상화가 무려 26점이 된다. 그 가운데 <<큰 모자를 쓴 잔느 에뷔테른느>>도 있다. 그 초상화도 많은 미술평론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 그대로다.

     

       ‘대칭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

     

        모딜리아니의 친구들마저, 행복해하는 그들 가족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 했다. 잔느를 두고서는 ‘모딜리아니를 구한 천사’라고 치켜 올렸다. 또, 그녀한테 ‘누아 드 코코’라는 별명까지도 붙였다. ‘야자나무열매 코코넛’이란 뜻이다. 잔느의 머리모양이 코코넛 같고, 피부색도 코코넛 속살처럼 흰 데서 붙인 별명이었다고 한다. 모딜리아니가 잔느의 초상화를 그릴 적마다 캔버스 앞에서 모델이 되어 주었던 잔느는 가볍게 불평을(?) 했다고 한다.

     

        “당신, 왜 제 이쁜 눈의 눈동자를 그려주지 않으세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엔 제 기묘한 눈 때문에 반했다면서요?”

     

        그러자, 모딜리아니는 참으로 묘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음, 내가 당신의 영혼을 그릴 수 있을 때 비로소 당신의 눈동자를 그릴 수 있을 거야!”

     

        실제로 모딜리아니가 그린 그 많은 잔느의 초상화에는 거의 눈동자가그려지지 않은 상태다.

     

       사실 농부 수필가인 나는 모딜리아니의 미술세계 등은 미술평론가를 비롯한 전문가들한테 맡겨 놓는 게 예의이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이 이미 논문이나 단행본 등을 통해 그의 작품세계에 관해 적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나는 그와 그의 동거자 잔느가 참으로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걸 놓칠 수가 없다. 잔느는 동거 3년차였던 1919년에 두 번째 아이를 가지게 된다. 임신 8개월에 접어들자, 잔느는 친정에 잠시 가 있게 된다. 자기네 셋방에는 난로를 지필 땔감마저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천지에 그림 그리기밖에 아무것도 할 줄 몰랐던 모딜리아니. 게다가, 결핵까지 악화되었으니... . 모딜리아니는 잔느가 보고 싶어 처가에 간 적도 있었다. 장인장모는 그를 끝끝내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딸 가진 부모 마음 다 같은 게 아닐까?

     

       “저 눔의 자슥, 환쟁이 주제에 어린 내 딸을 꼬드겨... . 비렁뱅이 주제에 골골대기까지 하면서 내 이쁜 딸의 신세를 다 망쳐 놓았으니... .“

     

       담장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연인을 만나고자 하였던 그의 초라한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기네 셋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방에 콕 처박혀 바깥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이웃들이 며칠씩이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걸 괴이하게 여겨 그의 셋방에 당도했다. 그는 병이 악화되어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긴급 후송된 곳이 위 세 번째 단락에서 이미 소개한 파라의 자선병원. 그는 입원한 지 이틀 만에 피를 토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였단다. 살아생전 그의 친구들이 그가 사는 꼴을 두고, 너무도 가슴 아파, 그의 이름 ‘모딜리아니’를 가지고, 달리 붙여 불렀다는 별명 그대로였다. 그들은 그를 ‘모디’라고 불렀다지 않은가. ‘모디’는 ‘저주받은 화가’란 뜻이란다. 하여간, 그는 그렇게 불행하게 갔다.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평생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

     

       모딜리아니의 비보(悲報)를 접한 동거녀이자 모델이었던 잔느. 그녀는 모딜리아니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수없이 키스를 해주었단다. 그러면서 고백했단다.

     

       “사랑하는 당신,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 드릴 게요.”

     

       그러고서 그녀는 슬픔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그가 죽은 이튿날 친정집 6층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단다. 그녀의 뱃속에는 8개월짜리 아가도 자라고 있었다는데... .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이 비극적 사랑은 모딜리아니의 삶을 신화(神話)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잔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도리스 트리스토프’라는 이는 <<모딜리아니의 예술세계>>에서 이렇게 밝힌다.

     

       ‘ 부드럽고 쓸쓸한 느낌을 이 이름(모딜리아니)은 비극적이며 시적(詩的)인 소설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또 독일 출신 화가 ‘루드비히 마이트너’는 모딜리아니를 두고 ‘최후의 진정한 보헤미안’이라고까지 하였다. 진실로, 모딜리아니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사후(死後)였다. 그가 살아생전 교분을 나누었던 ‘앙드레 살몽’이란 시인은, 모딜리아니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1922년에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한편, ‘베르하임 죈 화랑’에서는 그의 유작(遺作) 전시회가 열렸던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그렇게 갔다. 그의 최후의 연인 ‘잔느 에뷔테른느’도 그렇게 갔다. 후일 그들 둘은 합장이 되었다는데... . 묘비명이 각각 쓸쓸하기만 하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 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갔다.’

     

       ‘ 잔느 에뷔테른느. 1898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지극히 ‘생활인의 글’을 고집하는, 수필작가인 나. 나는 이제 그 많은 미술평론가들의 찬사와 달리, 고인이 된 모딜리아니한테 감히 고언(苦言) 한 마디를 던지고 이 글을 접으려 한다. 심지어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내내 뜨거운 눈물 흘리며 꾹꾹 참았던 말이기도 하다. 그의 장인장모도 이런 말을 분명 하였을 것이다.

     

       “거 보시오, 예술이 밥 먹여주던가요? 난로를 피울 장작개비도 손수 장만치 않아 마누라와 어린 딸까지 그렇게 떨게 하였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요? 그리고 자기 몸 하나도 건사(乾飼)치 못한 주제에 무슨 놈의 예술을?”

     

     

     

           (다음 호 계속)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본인의 서재,

     

       한국디지털도서관 윤근택 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인의 카페 이슬아지 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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