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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리
    수필/신작 2024. 10. 1. 16:12

    문학잡지를 통해서든, 신춘문예를 통해서든 작가로 데뷔한 이는 공인이지요.

    작가의 한 어휘, 한 문장은요,

    자신의 책임이지요.

    그럴 자신도 없다면요, 평론가 등의 비난 무서워한다면요,

    붓을 꺾어야지요.

    지지고 볶고 하는 가운데에서 발전 아니겠어요?

    감히, 공개적으로 밝힐 게요.

    몇 분 아니 계시는 제 이 메일 수신인들 가운데에서 '?'을 17년여 만에 손절입니다.

    그녀는 되어 먹들 않았어요.

    그녀는 수필가라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자기가 종이매체에 발표한 글들을 그 누군가는 읽고,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하고... .

    그것도 감내하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작가?

    ?, 이 시간부로 때려치우세요.

    당신은 근본이 아니 되어 있군요.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도 두려운 여인이 무슨 문학 타령, 예술타령?

     

     

     

                                                          사리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어느 아파트 격일제 경비원이기도 한 나. 쉬는 날 이른 새벽, 경산역 앞 ‘인력시장(용역)’에 갔다. 그날은 용케도, 흔히들 말하는‘노가다’현장에 ‘일당쟁이’로 팔려갈 수 있었다.

      현장에서 있었던 일. 땅 밑에 묻을 전선(電線)을 보호하는 ‘주름관[-管]’ 안에는 이미 주름관 제작 때에 가는[細] 철사가 들어 있었다. 지난 날 사반세기 통신회사에서 사무직 직원으로 근무할 적에, 공사현장 직원들이 쓰던 선통기(線通器)는 어느새 이토록 발전되었나니. 아무튼, 그 철사의 실마리에다 굵은 전선의 실마리를 묶은 다음, 반대쪽에서 철사를 한없이 잡아당기면, 전선이 그 주름관에 딸려 나오게 되는데... . 족히 100미터 될 그 철사를 잡아당겨내어야 하는 게 나의 1차적 임무. 사장은 요령을 가르쳐주며, 나더러 그 철사를 잡아당기라고 명했다. 자기는 저 끝에서 전선을 우겨넣으면서. 그러면서 그 철사는 재활용 하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잡아 당겨 뭉쳐두어도 된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군소리 않고 그가 이르는 대로 했다. 뒤늦게야 저쪽에서 일하던 전기기사가 다가와서, 펜치로 그 철사 끝을 집은 후 함께 당겨, 그 긴 전선을 주름관에 넣을 수 있었다. 그게 요령이요, 노하우. 덕분에(?) 나의 몸살은 이틀째 이어지고.

       나는 재활용 가치가 없다는 조력자(助力者) 전기기사의 말만 믿고, 그렇게 주름관에서 끄집어 낸 100미터가량의 철사를 둘둘 뭉쳐, 내 딴에는 폐기물을 최소화하고 있었는데... . 업주인 사장은 그 철사를 ‘사리기’ 시작했다. 왼팔꿈치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반환점(?) 삼아, '철사 사리기'를 잘도 하였다.

        “윤 선생님, 이 철사를 재활용하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우리가 폐품으로 수거해 가야하니... .”

       사실 그 양반은 내가 경험한 그 많은 업주들과 달리, 윽박지르지 않고, 시범을 그렇게 보여주었다.

    내가 그 ‘사리기’를 왜 모를까? ‘ 실마리’를 잡고, 위에서 소개했듯, 왼팔꿈치와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타원형, 아니 육상 경기장의 트랙 모양으로 감아 나갔다. 실, 새끼, 국수 등을 헝클어지지 않도록 감아나가는 게 ‘사리기’ 혹은 ‘사리’가 아니더냐? ‘갑(甲)’인 사장은 ‘을(乙)’인 나의 작업이 맘에 드는 눈치였다.

       정말 사설이 길었다. 어느새 나는 그 ‘사리’또는 ‘사리기’란 우리말에 충실할밖에. 참말로, 우리네 조상들은 그렇게 말하곤 하였다.

      내 선친(先親)은 겨우내 사랑방에서 짚을 치려 새끼를 꼬았고, 그 새끼를 사려, 짚멍석이며 봉태기며 삼태기며 온갖 연장을 만들어나갔다. 제대로 새끼를 사리지 않고 엉켜버리면 곤란한 일.

      내 자모(慈母)는 당신의 어린 딸들, 즉 내 누이들과 함께 삼[麻]을 삼았다. 그 일은, 오른 무릎 위에다 삼 실마리를, 이빨로 그 실마리를‘Y’로 벌린 후 또 ‘I’모양의 다른 삼 실마리를 끼워, 오른손바닥으로 비비는 일. 그렇게 하여 삼베실은 이어져 나갔다. 당신은 그 삼베실을 사려 나갔다. 대부분의 삼베실은 ‘물레’를 통해 ‘날라’, 880가닥(넘김수 440 가닥)의 씨줄로, ‘도투마리’에 꼬임 없이 감기되, 군데군데 질러넣은 ‘뱁댕이’를 통해 아주 가지런하게 . 사실 그 '뱁댕이'는 베틀에 앉은 당신의  어린 자녀들 '훈계의 회초리'도 잘도 되었고.

       한편, 당신은 수수깡을 축(軸)으로 삼아, 이른바 ‘꾸리실’을 꾸리고(사리고) 있었다. 정말 그것은 ‘사리기’였다. 그 길고 긴, 그러나 끊김 없던,당신의 인고(忍苦)의 세월 길이만치나 되던 그 꾸리실. 꼬이면 이빨로, 손으로 풀어 올올 오로지 한 가닥으로만, 끊김없는 한 오라기로만  만들었던 그 꾸리실. 그 꾸리실은 ‘북’ 에 담겨,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던 그 880가닥 ‘씨줄’을 넘나들었나니. 씨줄과 날줄의 그 조화여! 삼베는 그렇게 만들어졌나니!

        이제금 다시 이런저런 어휘 다시 생각한다.

      아래는 사전적 풀이. ‘사리다’. 어떠한 일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고 살살 피하며 아끼다. 바싹 죄어 가다듬다. 흐트러지지 않게 빙빙 둘러서 둥그렇게 포개어 감다.

    ‘사리다’. 국수, 실, 새끼 등을 헝클어지지 않도록 사리어 감은 뭉치. 떡볶이나 냉면 따위의 기본 음식 위에 덧얹어 먹는, 국수나 라면 따위의 부가 음식.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국수, 실, 새끼 등의 뭉치를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

    ‘사리’ 혹은 ‘사리다’는 영어로 ‘Coil’, ‘Spare onnself’, ‘Clinch’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

    또 하나 흥미로운 말. ‘저 녀석은 대가리에 우동 사리만 가득 찬 모양’이라는 말도 있다는 거. 사실 우리네 뇌 구조는 복잡하게 ‘우동 사리’처럼 되어 있는 데에서 유추된 비아냥.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사리다’는 ‘깊숙이 자리잡다’, ‘자리잡고서 기회를 엿보며 꼼짝 않고 있다’, ‘팔다리를 함께 모으고 웅크리다’라는 뜻. 여기서 ‘도-’는 강조의 뜻인 듯도 하고.

    명색이 수필작가인 내가, ‘사리’와 관련된 어휘들 가운데에서 ‘타래’를 결코 놓칠 리 만무하다. 어학적 의미. 실이나 노끈 따위를 사리어 뭉쳐 놓은 것. 수 관형사 뒤에서 의존적 용법으로 쓰여, 사리어 뭉쳐 놓은 실이나 노끈 따위를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 사실 내 어린 날에는 이 ‘타래’라는 말에 너무도 익숙해 있었다. ‘엿쟁이’가 가위를 맘대로 ‘철컥철컥’ 하며 마을에 왔을 적. 그의 리어카에는 무명실인 ‘타래실’이 언제고 실려 있었다. 그 타래실은 위에서 주욱 이야기해왔던 ‘사리기’의 산물(産物). 그 한 타래의 무명실이면, 한 동안 우리 열 네 명 가족(아버지, 어머니, 열 남매)의 옷가지 재봉에는 그저그만. 그 타래실을 양팔 발려, 두 손에. 어머니는 그 타래실을 실패에 감고 있었다. 실타래가 실패가 되었다. 사리가 실패가 되었다. 정리정돈이었으며, 그것이 면면(綿綿) 이어온 우리네 삶이었나니.

       사리, 사리, 사리!

      ‘사리(事理)’에까지 내 생각 닿을 줄이야!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사물의 이치나 일의 도리, 대적이며 차별이 있는 현상과 절대적이며 평등한 법성.

      내 생각은 성큼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리(舍利). 불타나 성자의 유골, 불타의 법신의 유적인 경전, 시신을 화장한 뼈.

    일용인부로 나섰다가, 저녁 무렵 일당 130,OO0원 챙기고, 기진맥진 가족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하루를 꼬임 없이 가지런히 ‘사렸다’는 이 행복감.

     

     

     

       작가의 말)

      억지는 곤란하지요. 본디 ‘수필’이란 문학 장르는 체험이 바탕이지 않아요? 부러 꾸미려고 해서는 아니 되겠죠?

      이 글을 내 손위 형제 자매님들께도 공손히 바쳐요.

      특히, 어버이의 열 남매 가운데에서, 야속하게도,  이미 저 세상으로 가버린 큰형님, 셋째누님, 막내누님 당신들 세 분게 이 글 바쳐요. 우린 그렇게 살았잖아요.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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