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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파아란 눈의 한국인’을 기림
    수필/신작 2025. 12. 18. 20:56

        어느 ‘파아란 눈의 한국인’을 기림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때는 1953년 11월 27일.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이 약 3년 후인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을 맺은 지 넉 달이 지난 때였다. 피란민들이 집단거주하는 부산 중구 영주동 판자촌에 대화재가 발생한다. 영하의 추위에, 판자촌 3,132채가 몽땅 타버리고, 약 3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게 된다.

       1953년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해온 ‘파아란 눈’의 준장, ‘리처드 S. 위트컴(Richard S. Whitcomb, 1894~1982(향년 88세),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남.)은 그 광경을 보고, 주저치 않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군수물자 창고를 열어, 의복과 식량들을 몽땅 이재민들한테 나누어주시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큰일 날 일이라고, 군법회의에 회부될 거라고 한사코 만류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 주민이 다 죽어가는데 군수물자가 다 무슨 소용이 있어.”

       그의 명령은 실행에 옮겨졌고, 그는 그 일로 본국인 미국으로 호출되어 가서 의회 청문회에 서게 된다.

       그는 당당하게 주장을 하게 된다.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인 것입니다.”

       의원들은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거기에 더해, 더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의료시설이 부족함을 알아, 이재민들을 돕고자, 장병들 월급의 1%씩을 매월 모금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 모금액으로 ‘메리놀병원’을 건립하였다. 이어서, 성분도병원, 복음병원, 고아원 등도 건립하였다. 한편,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부산대 장정캠퍼스’ 부지를 무상 제공받는 데 기여했다. 부산대는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46년 개교 이후 종합대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는 임기가 끝난 1954년 고국인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렀다. ‘한미재단’도 건립하였다. 그는, 그와 의기투합하는 당시 아동보육시설의 원장으로 지내던 한모숙 여사(1927~2017)와 부부의 연을 맺어 슬하에 ‘민태정’이란 아드님도 얻게 된다.

       그는 끝까지 한국인이기를 바랐다. 한국전쟁 휴전 후 예편하여,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자기 고국 미국으로 종종 건너가 모금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그의 유언도 감동적이다.

       “나 죽거든 한국에 묻어달라.”

       사실 참전장교였던 그는 미국 알링턴국립병원 유엔기념공원에 묻힐 자격이 있었음에도... .

       ‘파아란 눈의 한국인’이었던 그. 그는 88세의 나이에 눈을 감게 된다. 그리고 부산의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 안장된다. 그 묘역은 한국전쟁 참전 11국 2,300여 명 안장자들 가운데에서 유일한 장성급이라는데... .

       그의 약력이다.

       그는 1916년 ROTC 임관 후 1944년 노르망디 작전 중 연합군 병력과 물자수송을 지휘했으며, 그 업적으로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도 수여받은 바 있다. 1945년 일본 점령지였던 필리핀 탈환 상륙작전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953년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때에는 200만 톤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에 날랐다고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나 죽거든 한국에 묻어달라.”

       다시 한 번 그의 유언을 온 가슴으로 느낀다. 삼가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 이 글은 본인의 블로그인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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