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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일곱 대(2)수필/신작 2025. 12. 25. 02:39
라디오가 일곱 대(2)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전편(前篇) ‘라디오가 일곱 대(1)’에서는 내 ‘만돌이농장’에 일곱 대의 라디오가 있다고 자랑하였다. 그것도 어디에서 거저 주워 온 것들로, 네 대를 군데군데 설치해두었고, 세 대는 예비품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노라고. 가끔 이곳 농장으로 오는 아내, 차 마리아님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주워 온 라디오뿐만 아니라, 그처럼 주워온 이런 저런 물품에 관해 잔소리를(?) 하곤 한다. 싹 다 실어다가 내다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까지.
하더라도, 라디오와 관련해서는, 배우 겸 탤런트인 ‘신구’ 선생의 그 유명한 광고 멘트, “니네가 게맛살을 알어?”를 패러디할밖에.
“니네가 진정으로 라디오의 참맛을 알어?”
시계바늘을, 2025년 현재로부터 60여 년 전으로 훽 돌린다. 한국전쟁 전후 세대이고 1957년생인 나. 당시는‘삐삐선(-線)’을 모르면 인간도 아니었다. 그 ‘삐삐선’이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야전해서 포설했던 전화선이다. 그 삐삐선은 심선(心線)이 연철선과 강철선으로 조합을 이뤄, 굳이 전주(電柱)에 매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땅바닥에 깔아도 되는 전선이었다. 장날에, 부인들은 그 삐삐선으로 엮은 ‘삐삐선 광주리’를 들고 다니는 게 유행이었다. 등하굣길에서 얼마나 그 ‘삐삐선 광주리’를 자주 보았던가. 그들 미군들이 버리고 간 삐삐선을 요즘 식으로 말해, 재활용한 사례다.
내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내 신실한 애독자님들께서는, 특히 젊은 세대 애독자님들께서는 이런 질문을 금세 하실 듯하다.
“윤 작가 선생님, 그 삐삐선이 라디오와 무슨 관련이 있기에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 맨 처음 ‘라디오’라는 ‘문명의 이기’를 알게 것은 삐삐선 덕분이었다는 거. 사실 그때는 ‘라디오’라는 개념도 정착하지 않았다. 그저‘앰프’라고 하였다. 이러면 내 이야기 다시 미궁으로 빠져드는 듯한데... .
내가 나이 예닐곱 될 때까지는 내 고향, ‘경북 청송군 청송읍 금곡2리(초막골)’ 100여 세대에 라디오를 가진 집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내 고향마을에는 전기조차도 내가 국민 학교 오 학년 때 비로소 그 효율이 떨어진 100볼트짜리 전기가 들어왔고. 그때 읍 소재지 월막동에 ‘소리사’가 하나 있었다. 그 사장의 볼이 홀쪽하여, 다들 ‘홀쪽이 소리사’라고 부르곤 하였다. 그분은 청송 읍내 여러 마을 ‘라디오 사업’을 독점하였다. 그분은 집집 조악(粗惡)한 나무상자꼴의 앰프를 달아주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On/Off 스위치’만은 제대로 달려 있었던 것 같다. 그 요상한 상자에서는 아리따운 아가씨의 목소리도 ‘찌찌’ 잡음과 함께 흘러 나왔다.
여름날 밤, 엽연초[담배잎]를, 품앗이로 엮던 태수 아버지는 곧잘 장난스레 말하곤 하였다.
“근택아, 저기 앰프 속에 아가씨가 산대이!”
어린 우리 남매들은 정말로 신기하게만 여겼다.
당시 읍내 ‘홀쪽이 소리사’ 사장은, 봄 한 철 보리 몇 되, 가을 한 철 벼 몇 되 집집이 청취료를 받아가곤 하였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그 사업은 ‘공청’이었고, 그렇게 받아간 청취료를 어른들은‘모곡(耗穀)’이라고 불렀다.
돌이켜본즉, 그분 ‘홀쪽이 사장’은 시대를 앞서간 방송업자였음이 분명타. 그분은 나름대로 ‘방송 송출 시스템’을 구축했던 게다. 야전에 아무렇게나 포설하여도 쉬이 끊어지지 않는 삐삐선을, 미군이 버리고 간 그 전선을 재활용하여 방송 재송출을 하였으니까.
그 ‘홀쭉이 소리사’가 조류(潮流)에 밀려 폐업하자,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서 열 남매였던 우리 열 두 식구는 그길로 까막눈이 되어버렸다.
어느 날 잎담배 조리를 하던 아버지가 용단을 내렸다. 당신의 아들로서는 맏이이자 내 백씨(伯氏)인 ‘경택(景澤)’한테 큰 인심 쓰듯 허락하였다.
“애비야, ‘행갯들’조씨네 댁에 가려므나. 지난 장날에 사정을 해두었다. 돈을 ‘체주기’로 하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내 백씨는 그길로 30 리도 넘는 그 산길을 걸어, 그 당시 돈으로 30,000 원을 꾸어왔다. 그 돈으로, 우리의 ‘가보(家寶) 1호’ 인,‘ 7석 라디오’를 샀다. ‘7석 라디오’는 ‘6석 라디오’에서,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 업 그레이드 된 라디오. ‘7석’은 그 라디오 부품들 가운데에서‘트랜지스터(transister;반도체소자)’가 일곱 개 들어있음을 뜻한다.
그렇게 산 라디오를 온 가족이 신주 모시듯 하였다. 자칫,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최종적으로 ‘사이클’을 조작한 이가 책임을 져야 하는... . 사실 당시 이종사촌형님이 청송군 부남면 어느 ‘소리사’에 근무하였고, 그를 통해 구입한 것인데, 라디오에 자그마한 문제가 생겨도 그 이종사촌형님 ‘해진’의 농간인 것으로 온 식구가 욕해대곤 하였다. 50~ 60년 흐른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런 해프닝이지만... . 더욱이, 멀쩡한 라디오도 아파트 분리 배출장에 함부로 내다버리는 세월을 살다보니... .
이렇게 글을 맺자니, 아쉬운 점 없지 아니 하다. 내 중씨(仲氏)는 파월장병이었는데, 전장에서 베트콩이 쏜 탄환 유탄에 옆구리를 다쳐 모국으로 후송되었다. 그는 전장에서 선진 미국의 문화에 맛들여졌던 모양. 아니, 총각시절 그 ‘홀쭉이 소리사의 앰프’와 ‘7석 라디오’에 한이 맺혀서인지, 그 귀하기만 하였던 ‘스테레오 전축’을, 당신의 예비부인과 함께, 대구로 원정하여(?) 사오고야 말았다. 당신 새 집에 쓸 것도 아니면서, 본가에 기증코자 그렇게 하였다. 그때 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로 지고 왔던 내 선친(先親)은 그 꼴을(?) 보고 거의 까무라치다시피 하였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는데, 그때 내 중씨가 자기결혼기념물로 사와서 본가에 기증한 그 ‘진공관 스테레오 전축’이, 나의 50~60년 음악 기행(?) 출발점이었다는 거. 내가 ‘음악 칼럼니스트’라고 내세우는 것도 공연하지만은 않다. 그때 예비부부였던 내 중씨가, 음향기기 판매상에서 서비스로 받은 ‘LP판(long play record; 장시간 음반)’가운데에는 흑인 출신 색소폰 연주자, ‘실 오스틴(Sil Austin, 미국, 1929~2001)’의 <고엽(Autumn leaves)>이 있었다. 그 연주곡이 내가 서양음악에 최초로 맛들여진 계기가 되었고.
다음 호 계속)
곧바로 ‘라디오가 일곱 대(3)’가 이어질 것이다. 애독자님들께서 글 분량에 지칠까봐서.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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