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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4) - 1977년에는 -
    수필/음악 이야기 2023. 8. 13. 13:51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4)

                                                         - 1977년에는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나한테는 스무 분 안팎 정기 e메일 수신인들이 계신다. 그분들 가운데에서 길게는 20여 년 나의 e메일을 꼬박꼬박 읽고 계시는 분들도 계신다. 다만, 답신 내지 독후감 없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그게 크게 아쉽지만... . 나는 그분들께 거의 매일 한 통의 e메일을 통해, 계절인사 또는 신작(新作)을 띄워온다. 특히, 계절인사는 시의적절한(?) 음악으로 갈음한다. 오늘 내가 그분들한테 띄운 계절인사는 ‘리차드 클레이더만(Richard Clayderman, 1953~, 프랑스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의 <가을의 속삭임>. 곧 리차드 클레이더만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할 텐데, 우선 내가 계절마다 그분들한테 띄워왔던 음악선물을 한바탕 소개해야겠다.

        봄에는 ‘펠릭 멘델스존’의 <무언가> 가운데에서 <봄의 노래>, 유월에는 차이콥스키의 < 사계> 가운데에서 <유월(뱃노래)>, 여름 장마철에는 ‘게오르그 장피르’의 팬 플루트 연주곡 <여름비>, 피서기간에는 이 글 주인공인 리차드 클레이더만과 ‘프랑스 국립음악원’ 동문인 ‘장 끌로드 볼레리’의 트럼펫 연주곡인 <바다의 협주곡>과 ‘제임스 라스트 오케스트라’의 <비스카야>, 시월에는‘조지 윈스턴(1949~2023.6.4.미국)’의 <추수 감사절>, 그리고 섣달에는 조지 윈스턴의 <December(12월)> 등. 사실 내 수필창작 에너지원은 그 무엇도 아닌, ‘세상의 모든 음악’.

         이제 내 이야기 고삐 바투 잡는다. <가을의 속삭임>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 글 주인공인 ‘리차드 클레이더만’한테는 어떤 일이 있었던지 집중적으로 살펴볼 차례.

         때는 1977년. 정확히는 그해 12월 3일. 내 나이 20세일 적. 대학 일학년, 꿈에 한껏 부풀어 있던 나는 여름방학 기간 중에 안면신경마비에다 장티푸스까지 겹쳐, 부득이 휴학계를 제출할밖에. 그런데 가혹한(?) 막바지 박정희 군사정부는 알짤(일절) 없었다. 사실 내 선친 또래였던 독재자 박정희는 잔혹한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 일학년 학도호국단 멤버였으되, 휴학으로 말미암아 학적변동자로 몰려, 국군병원에서 신체검사와 동시에 강제징집되고(?) 만다. 신체검사하는 날 영장을 받은... .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던가. 어차피 복무해야 할 군대 3년이니... . 흔히들 ‘보리 카투사’혹은 ‘꽃보직’으로 일컫는 ‘방공포병 발칸포 사수’가 되어, 수원의 어느 전투비행장에 근무하게 된다. 밤마다 야간 보초를 서면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몰래몰래 듣게 되었는데... . 그때 아주 자주 흘러나오던 음악이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그 피아노 연주곡은 흔히들 말하는 대세. 선풍적 인기를 누리는 곡이었다. 후일 1980년에 제대하여 대학 1학년 2학기로 복학한 나. 시내 레코드 가게에서 그 많은 LP판들 가운데에서 맨 먼저 ‘리차드 클레이더만’부터 사게 된다.

         이 글의 완성도를 더하고자 몇몇 날 다시금 리차드 클레이더만을 공부하였다. 정말 그이한테 그러한 일이 있었던가 하고, 새삼 놀라게 되었다.

         리차드 클레이더만, 그는 피아노 천재였다. 그의 부친은 피아노 교사였고, 그의 모친은 스웨덴계. 그의 부친은 어린 아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쳐준다. ‘왕대밭에 왕대 나고, 쫄대밭에 쫄대 난다’는 속담 새삼스럽다. 그는 6세 때에는 자기 생각을 모국어보다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더 쉬웠다고 한다. 12세가 되던 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해서, 16세 때 수석 졸업을 하였다고 한다.

        그 천재 피아니스트는, 둘레의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할 거라고 굳게 믿었음에도 불구하고,방향을 약간 틀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이 중병을 앓자,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입장. 해서, 그는 락 그룹의 ‘세션 음악인’이 된다. 세션 음악인이란, 일종의 ‘알바’ 내지 ‘프리랜셔’.그는 여러 종류의 악기를 구입해야했기에, 빠듯한 살림으로 말미암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울 지경에 이르렀고, 그 일로 말미암아 속병을 앓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의 연주 실력은 주변으로부터 나날 인기를 얻어가게 된다.

        리차드 클레이더만, 그가 23세가 되던 1976년에 기적 같은(?) 일이 생겨난다. 그때 내 나이는 그보다 세 살 아래인 20세. 그는 음반사 ‘델핀(Delphine)’프로듀셔 ‘투생(Olivier Toussaint)’으로부터 한 통 전화를 받게 된다.

         “유명한 작곡가인 ‘폴 드 세느빌(Paul de Senneville, 1953~ 음악프로듀서, 기획, 프랑스)’이 갓 태어난 둘째딸 ‘아드린’을 위해 곡을 적었대. 제대로 된 연주자를 공모하고 있대. 오디션에 나가 볼 생각 없어?”

         해서, 리차드 클레이더만은 얼떨결에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다. 경쟁률은 20:1이었다. 그런데 그가 기적적으로 뽑혔다.

         그때 ‘세느빌’의 말은 새삼 가슴 찡하게 한다.불가(佛家)에서 이르는 ‘시절인연(時節因緣)’ 즉, ‘때가 되어야 서로 만날 수 있음’을 생각하기에 족하다. 그야말로 '마케팅학‘에서 말하는 ‘MOT(moment of truth)’. 그 귀중한 인연이여! 하기야 나도 300:1  경쟁에서, 당시 최고이고 유일무이한 통신회사, '한국전기통신공사(현재 KT)' 공채에, '천재일우' 합격하였지만... .

         “리차드의 수줍어하면서도 겸손한, 그리고 리차드만의 연주 스타일, 또한 그의 공손함과 친절함에 이끌렸으며, 좋아하게 되었고, 우리(세느빌과 ‘투생’은)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78년에 그 곡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로 데뷔한다. 대박. 놀랍게도, 그 곡은 자기 모국 프랑스가 아닌, 독일 어느 드라마 배경 음악으로 쓰여, 그 연주곡이 그의 고국 프랑스로 재수입되는 일이 생겨났다.   그 곡,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는 거듭거듭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 지금부터는 간략간략 소개하겠다. 그의 그 연주곡은 최초의 뉴에이지 피아노곡으로 기록. 그 곡이 발표되자, 어느 피아노 매장에서는 한 해 2,500여 대 팔리던 피아노 판매량이 5,500여 대로 늘어났다는 여담. 그는 내가 군대 입대한 1977년에 데뷔. 그때부터 전세계적으로 디스크가 무려 700만 장 팔려나갔다는 기록. 20세기 대히트한 연주곡 가운데에서 하나.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의 창시자라고 부르기도 함. 기네스북에도 오름. 위에서 잠깐 소개한 트럼펫 주자, ‘장 끌로드 볼레리(<바다의 협주곡>과 <도란의 미소>로 유명한 연주자)’와 스페니쉬 기타 주자, ‘니콜 드 안젤리스(1949~ 프랑스)’와 프랑스국립음악원 동문수학한 이. 그들 둘과 더불어, 각기 다른 악기로, ‘1980년대 프랑스 팝 3인방’일원이었던 이. 1970년대는 ‘끌로드 치아리( Claude Ciari,1944~, 프랑스 기타리스트)’가 < 물 위의 암스테르담>, <첫발자욱>, <엘 빔보> 등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면... .

         리차드 클레이더만, 그는 여러 기록을 깨뜨렸던 게 사실이다. 클래식, 팝,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편곡하여 연주하는 등. 그리고 한 해 365일 가운데에서 250일 이상 음악연주여행을 해왔던 이. 더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동갑내기인 작곡가 ‘폴 드 세느빌’의 눈에 들어, 세느빌의 갓 태어난 난 둘째딸 ‘아들린’ 덕분에 대성했다는 점. 그 곡 <아들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발표한 1978년 기준으로, 꼭히 17년이 지난 1994년 ‘폴 드 세느빌’은 다시 곡을 적게 된다는 사실. 바로 <어른이 된 아들린>. 그 곡도 당연히 리차드 클레이더만이 최초로 연주했을 게 아닌가. 내가 그 연주곡을 거듭거듭 들어본즉,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보다도 감동적이지는 못했던 게 사실이다.

        끝으로,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그 많은 연주곡들 가운데에서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주욱 소개하겠다. <꿈속의 웨딩>, <야생화>, <겨울연가>,<보이지 않는 사랑>,<숲속의 오솔길>, <어린 시절의 추억>, <별밤의 피아니스트>, <기쁨의 눈물>, <슬픔의 꽃다발> 등.

        사족을 붙인다. 예술가는, 예술은 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듯, 결코 ‘시절인연(時節因緣)’도 지나칠 수 없다. 펠릭 멘델스존은,  살아생전 인기 좋았던 ‘식탁음악’의 창시자,‘텔레만’에 밀려 빛을 보들 못했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 더군다나  바흐는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 북독일 교회 음악장이었던‘북스테후데’한테 명함도 감히 내밀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사후 90여 년 후 펠릭 멘델스존이 무려 세 시간짜리 <마태수난곡>을 연주함으로써 ‘음악의 아버지’로 재탄생, 부활했다는 점. 나는, 30~40년 수필작가로 행세해온   나는, 결코 그 점을 놓칠 수가 없다. 나도 내 사후 200여 년 후 기린아가 나타나기를.

     

         작가의 말)

     

         공부만이 답이다. 또 해냈다. 이 연재물 이어갈 수 있다는 점. 희열이다.

         ‘결코, 어설프게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나는 끊임없이 공부한다.

        내 모든 문학작품 창작 에너지는‘ 세상의 모든 음악’에서 나온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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