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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2)- 320km 걸어서 대가(大家)를 알현하다 -
    수필/음악 이야기 2023. 7. 18. 11:19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2)

                     - 320km 걸어서 대가(大家)를 알현하다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1703년 3월 4일경. 그는 바이마르의 요한 에른스트 공작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다. 단지 ,그곳은 그가 머무르는 기항지(寄港地)였을 따름. 이미 그의 마음은 당시 아른슈타트의 ‘노이 교회’에서 제작 중이었던 오르간에 가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 후 강조한 점이 교회음악이고, 그 교회음악의 중심에 오르간이 있었다는 사실. 해서, 교회마다 나름대로 대형 오르간을 경쟁적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흐름 속에, 오르간이 완성되자 그는 그 악기를 시험해 보았고, 1703년 8월, 18세의 나이로 오르간 연주자에 임명되었다.

        1705년 10월. 20세였던 그는 한 달 동안 휴가를 얻었다. 320km를 걸어, 북독일 항구도시, 뤼베크에 자리한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를 찾아간다. 그곳 교회의 오르간니스트는 '북독일오르간악파'를 이끌고, 당대 최고 오르간니스트로 추앙받던 ‘디트리히 북스테우데(Dietrich Buxrehude, 1638~1707, 덴마크-독일)’가 재직 하는 곳.

        그는 북스테후데가 지휘하는‘아벤드무지크(Abend-musik;밤의 음악)’연주회에 청중으로 가게 된다. ‘아벤드무지크’는 이전부터 내려오던 관습을, 북스테후데가 처음으로 제도화하였고, 뤼베크 도시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19세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하여간, 이 글 주인공인 그는 크게 인상을 받게 된다. 얼마나 매료되었으면 그리하였을까. 그는 주어진 4주간의 휴가도 저버리고, 무려 4개월을 그곳에 머무르며 북스테후데 연주에 매료되었다. 자연, 후일 그는 그 동안의 부재 등 일들로 문책을 받기까지 하였다.

        북스테후데는 장래가 촉망되는 그를, 자기 후계자로 자리를 제의하였다. 단, 그 교회의 관습에(?) 따라, 자기 7명 딸 가운데에서 한 아가씨와 결혼하여, 가족의 일원이 되는 조건. 당시 68세 노인이었던 북스테후데는 나이 20세 그를 재차삼차 설득하여 사위로 삼으려하였으나, 그는 야반도주를 하였다고 한다. 사실 그가 북스테후데를 방문하기 3년 전인 1703년에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 그와 동갑내기인 헨델도 자기 친구 마테존과 함께 함부르크에서 출발하여 북스테후데를 알현했다. 그때도 북스테후데는,“내 딸과 결혼해주면, 내 자리를 넘겨주겠네.”하였다. 헨델도 도망쳤다는 일화. 왜? 북스테후데 첫딸은 추녀였던 모양.

        잠시. 북스테후데가 몸담았던 그 교회의 오르간니스트 계보 소개. 북스테후데는 전임자 ‘프란츠 툰더’의 딸, ‘안나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여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그 자리를 승계 받았다. 둘은 금슬이 좋았던지, 위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슬하에 딸 일곱을 두었는데, 첫딸의 얼굴이 영 아니었던 모양. 살아생전 북스테후데는 그로 말미암아 후임자를 정하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행스레, 사후에 ‘요한 크리스티안 시퍼데커’라는 작곡가 겸 오르간니스트가 그의 큰딸과 결혼함으로써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에피소드.

       내 이야기는 다시 본류(本流)로.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는 한 눈 팔지 말고 내 이야기 끝까지  따라오시기를 바라면서, 그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만은 아직 밝힐 수 없다. 대신, 오늘날 오르간 연주자들도 오르간을 배우자면, 북스테후데와 이 작품 주인공을 꼭 거쳐야한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서양음악에서, 특히 교회음악에서 이 글 주인공이 차지하는 정도를 알 수 있다. 또, 이 글 주인공이 음악인으로서 출발점이 오르간이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320km를 도보로, 대가한테서 한 수 제대로 배우고자 길을 떠났던 그. 그가 대체 누구? 미리 말하건대, ‘예술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그가 바로 ‘음악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독일)’이다.

        바흐, 그와 북스테후데의 관련성을, 유사성을 토막토막 적는 것으로 이 글 마무리하고자 한다.

        바흐는 그때 직장 직무규정도(?) 저버리고, 40일간 ‘뤼베크’에 머무르면서, 북스테후데의 ‘아벤드무지크’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해서, 명작 <토카타와 푸가(BWV565)>와 <파사칼리아와 푸가(BWV582)>를 적게 된다. 특히, 이 두 작품 가운데에서 <파사칼리아와 푸가(BWV582)>는 북스테후데의 < 파사칼리아 d단조,BuxWv.161)>과 놀랍게도 맥을 같이 한다. 이 글의 완성도를 더하고자 북스테후데의 그 곡을, ‘거듭듣기’해본즉, 종교적인 경건함과 웅숭깊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로, 음악 연구가들 내지 음악평론가들은, 이들 오르간 분야의 명작들은 북스테후데 방문 때 받은 큰 인상을 바탕으로 적은 곡으로 말한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BWV988)>은 북스테후데의 < 라 카프리치오사 주제에 의한 32개의 변주곡>의 영향이라고들 한다. 사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후에 붙여진 별명. 바흐 자신은 그 곡을 <2단 건반 클라비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변주곡들로 이뤄진 클라이버 연습곡>으로 이름지었고, 30개 변주곡으로 된 모음곡이니... . 모방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바흐는 건반악기에 관한 한, 아니 오르간에 관한 한, 당대 최고의 오르간주자였던 북스테후데의 영향을 입은 것만은 분명타. 게다가, 북스테후데는 오르간의 페달을, 단순 ‘통주저음’을 내는 수준을 뛰어넘어, 음악 구성 일원으로 적극 동참시키는, 하나의 ‘성부(聲部)’로 삼았다는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층 웅장하게, 화려하게 울림을 주었다는 거. 바흐도 48세 연상이고, 장인이 될 뻔도 했던, 당대 최고의 오르간니스트 선배음악인(?) 북스테후데의 방식을 응용했다는 점.

        이제, 내 이야기를 슬슬 접어야 할 시간. 내가 더 이상 뭐라뭐라 적게 되면, ‘얼분(알분) 떤다’, 즉 ‘젠 체 한다’고들 할 테니... .

       그래도 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애독자들께 고백해야겠다.

        “예술, 그리 만만하지 않더이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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