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1)- 본 시리즈물 제 ‘92화’ 보완함 -
    수필/음악 이야기 2023. 7. 16. 10:58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1)

       - 본 시리즈물 제 ‘92화’ 보완함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내 내면의 강렬한(?) 요구로 말미암아, ‘요한 세바스찬 바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저 하여야겠다. 그는 불세출의 음악인이었음이 분명타.

       우선,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2)’전문(全文))을 다시 소개한 후 이야기 이어가겠다. 이 글이 꽤나 길어지더라도, 애독자님들께서는 인내심 있게 읽어주시었으면 좋겠다.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2)

       - 그의 남자들 -

     

       위 부제에 나오는 ‘그’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 독일. 이하 그의 성 ‘바흐(Bach; ‘작은 시냇물’이란 뜻임.)로만 줄여 적을 것임.)’. 그는 한평생 자기 고국인 독일을 떠나지 않았으며, 독실하고 경건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교인으로 지냈고, 교회의 오르간주자로, 칸토르(음악장)로 지냈다. 그와 동갑내기이고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바로크 음악의 쌍벽’을 이뤘던 헨델(1685~1759,독일)과는 다소 다른 점이 있다. 바흐는 당시 교리(敎理)에 따라,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다. 반면, 헨델은 오페라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영국으로 도주 아닌 도주를 하게 된다. 둘에 관한 이야기는 본 연재물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이야기(4)’에 있으니, 한 차례 읽어보시길.

     

      대신, 이번 이야기는 사후(死後)의 바흐를 더욱 빛내고, 자신들도 음악적 위업을 이룬 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초점을 맞춘다. 출몰연도순이다.

     

      1. 펠릭 멘델스존(1809~1847,독일)과 <마태 수난곡>

     

      멘델스존은 14돌 생일날, 그의 할머니한테서 낡은 악보 하나를 생일선물로 건네받는다. 멘델스존은 그야말로 ‘뿅!’했다. 그렇잖아도 평소 흠모하던 바흐. 바흐의 곡 <마태 수난곡> 필사본 악보였다. 그게 정확히 1823년의 일. 바흐가 세상을 뜬 지 73년 만의 일이고, 바흐가 그 곡을 초연한 지 94년 만의 일. 그 곡은 바흐가 자기가 속해있는 교회 당국으로부터 의뢰받아 적었다. 단, 예수님의 성스러움을 자칫 훼손할 수도 있으니, 교리에 따라, 오페라는 절대 아니 된다는 조건이었다. 바흐는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오페라와 유사한 형태의 오라토리오(聖譚曲)로 지었으며, 그가 소속된 교회에서 성금요일에 단 한 차례 초연했다. ‘예수님이 잡히시다’로부터 수난을 하는 마태복음(나를 포함한 천주교인들은‘마태오복음’이라고 한다.) 제 26장과 제 27장 끝까지 내용을 기본으로, 아리아를 포함해 무려 3시간 소요되며 합창으로 끝나는 곡. 워낙 길이도 긴 데다가 성부(聲部) 및 악기 편성 등 익숙하지 않은 음악형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하며 그 동안 잊고 지내왔던 곡. 그러했음에도, 멘델스존은 그 악보를 파고들어, 2년 여 리허설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는 20세가 되던 해, 절친한 친구인 오페라 가수 ‘데브리엔트’와 당시 ‘베를린 음악협회 회장’이며 자기 스승인 ‘첼터’의 협력으로, 드디어 ‘베를린 음악협회 대 홀’에서 <마태 수난곡>을 무대에 올린다. 물론 지휘봉은 20세에 불과했던 멘델스존이 직접 잡았다. 때는 1829년. 바흐 사후 79년 만의 일. 바흐의 초연 후 꼭히 100년 만의 일. 총 78곡이 되는 대작(大作). 당대 최고 철학자 ‘헤겔’도 음악회에 참석했다. 그의 기록은 그 모든 걸 대변하는 듯.

      ‘ 바흐는 위대하고 진실한 신교도였으며, 강인하고 박식한 천재였다.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의 음악을 완전한 형태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멘델스존이 부활시킨 바흐. 바흐는 그길로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다. 많은 음악 평론가들은 일제히 이런 말을 한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이 인류 최초의 미술걸작이라면, 바흐의 <마태수난곡>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음악걸작이다.’

     

       멘델스존은 바흐 사후 100여 년 세월이 흐른 다음에 비로소 바흐를 부활시켰다. 사실 바흐는 그 <마태수난곡>을 적기 전에 <요한수난곡>을 적었다. 그 <요한 수난곡>도 멘델스존의 <마태수난곡> 부활업적으로 하여, 요즘 다시 주목받고 있다니 다행한 일. 단, 바흐는 총 5편의 <수난곡> 오라토리오를 적었다는데, 두 편밖에는 악보가 남아있지 않다고 하니 아쉽다.

    여담이다. 유대계였던 멘델스존은 유대교에서 개신교로 개종까지 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조부 및 부친과 갈등이 심해져서, 심지어 성(姓)조차 아내의 성인 ‘바르톨디(Bartholdy)’로 갈아치울 정도였단다. 모르긴 하여도, 그가 바흐의 <마태수난곡>에 얼마나 매료되었으면... .

      ‘바흐의 남자, 멘델스존, 주님의 품안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2. 파블로 카잘스, 1876~1973(91세)와 ’<무반주 첼로 모음곡>

     

      이 부분은 직전에 적은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1)’의 부분부분을 ‘콜라주(collage)’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이 점에 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상략) 4개의 현으로 된 첼로. 첼로는 독주악기로는 아주 부족한 악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했는데... . 스페인 카탈루냐의 어느 11세 소년한테는 첼로가 만들어내는 음이 색다른 체험이었다. (중략)

       그는 11세가 되던 해, ‘바르셀로나 음악원’에 입학하여, 그날 ‘피아노 트리오’에서 첼로를 연주했던 ‘ 호세 가르시아’의 제자가 되고, 본격적으로 첼로연주를 공부한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제대로 된 악보로 교본삼아 첼로를 공부하고자 중고서점을 찾게 된다. 그때 그의 나이는 13세. 정확히 1889년. 그는 중고서점에서 해질 대로 해진 첼로 악보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 길로 그는 무려 12년 동안 그 악보를 연구하고 연습하게 되었으니... . 그 악보는 이미 149년 전에 이승을 떠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의 악보. 사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악보가 존재하는지조차도 몰랐다. 그저 연습곡 정도이겠지 정도로만 알고 지내왔던 터. 더욱이, 위에서도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첼로는 독주악기로는 부족한 점이 여로 모로 많았기에. 이 글 주인공의 혜안도 대단하지만,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그 모험심(?) 또한 대단하다. 바흐는 그 악보에다 <무반주 첼로 ?>라고 이름붙였기에 하는 말. 달리 말해, “ 첼로도 무반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임을, 내가 이 곡을 통해 알려주니... .”가 되니까.

       (중략) 그는 바흐의 악보를 손아귀에 넣고, 무려 12년 동안, 바흐의 그 속뜻을(?) 헤아려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매일매일 6시간 이상씩 연주연습하고 탐구하였다. 그때까지 ‘첼로 연습곡’으로만 알려져 있던 그 악보. 그는 바흐의 그 악보를 ‘구약성경’이라고 부를 만큼 엄청난 지위로 올려놓게 된다. 제 1곡 ‘프렐류드’를 시작으로 제 6곡에까지 이르는 모음곡. 사실 그 모음곡 제 5곡과 제 6곡은, 바흐가 그 당시만 존재했고, 현존하지 않은 첼로 등을 상정(想定)하여 적고, 지시어 등이 따로 없는 등 재현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했음에도, ‘파블로 카잘스’는 바흐의 그 곡을 표준화하여, 최적의 연주상태로 다듬게 된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란 버젓한 이름도 그로부터 지어지게 된다.

       제 5곡의 경우, 본디는 활 쓰는 법이라든가 템포 등이 명시되어 있지 않았으나, 운궁법과 템포를 이해하기 쉽게, 연주하기 쉽게 윤색.

       제 6곡의 경우, 일반적 형태의 첼로로는 연주하기 어려운, ‘비올라 폼포사’라는 5현 악기를 위해 적은 악보였음에도 연주하기 쉽게 표준화.

       그렇게 12년 동안 탐구했던 ‘카잘스’는,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음반을 만들게 된다.

       카잘스는 그 오랜 동안 바흐 연구로(?)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첼로의 전설’ 등의 명성을 얻게 된다. (중략)

    첼로라는 악기도 반주 없이 연주할 수 있다며,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적은 바흐도 대단히 존경스럽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재정립한 카잘스 또한 존경스럽다. 현대 첼리스트들의 필수 교본이라는... .(중략)

    첼로 연주에 관한 한, 카잘스에 필적할 만한 연주자가 금세기에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중략)

       요컨대, 13세 소년 첼리스트 카잘스가, 한 평생 탐구하고 연습하여 , 바흐의 그 묻혀 있던 너덜한 악보로, 첼로를, ‘반주 하나 없이도 독자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로 거듭나게 했다는 거. 인간의 진지한 목소리와 아주 닮은 첼로. (끝.)>

     

       셈을 해본즉, 바흐 사후 정확히 186년이 지난 다음에 카잘스가 바흐의 <첼로 모음곡>을 부활시켰다.

       ‘바흐의 남자, 카잘스, 당신도 하느님의 품안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3. 글렌 굴드(Glenn Gould,1932~1982, 캐나다)와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는 괴짜 피아니스트였다. 이승에서 누린 나이 50세. 약물중독으로 인한 사망설,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설 둘이 있다. 그는 한여름에도 외투에다 목도리에다 장갑을 착용했던 이. 피아노 연주에 앞서 뜨거운 물에 손을 20여분 담갔다가 연주했던 이. 병균이 옮길세라, 남들과 악수도 꺼렸던 이. 피아노 연주 때에는 자기 부친이 만들어주었다는, 휘청거리는 고무다리가 네 개 달린 키 작은 의자를 늘 들고 다니던 이. 그러니 피아노 연주 때마다 온몸이 흔들려 흐느적대며 건반에 얼굴을 숫제 파묻다시피하며 연주하던 이. 양손으로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내내 허밍하고, 한손이 놀 적에는 허공에 지휘를 하며 휘젓던 이. 마치 자폐아 행동 같던 이. 내가 본 그의 연주 동영상에도 확연했다.

       그러했던 천재 피아니스트가 바흐와 자신한테 제대로 큰일(?) 한 번 저지르게 된다. 그가 23살 되던 1955년에, 그 누구도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악기인 피아노란 악기로 <골드베르크 변주곡>를 38분 만에 주파(走破)하고 만 것이다. 대체로, 90여분 걸린다는 그 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그것도 피아노의 전신(前身)인 ‘클라이버족(族)’ 악기를 위해 작곡된 곡을. 잠시. 피아노 전신인 클라이버족의 악기는 나라에 따라, 하프시코드·클레브생·클라비 쳄발로 등으로 두루 부르고 있다는 점 더듬고 넘어가자. 하여간, 그는 20세기에 개량된 클라이버도 아닌, 피아노로 그 곡을 연주하게 되었다. 운도 따랐다. 그가 1955년에 그 곡을 공개석상에서 연주하자, ‘컬럼비아 음악사’의 관계자가 이튿날 곧바로 계약하자고 제의하여 음반출시까지 이뤄졌다. 대박이었다. 냉전시대였던 그때, 그는 1957년 구소련으로 초청되어 그곳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함으로써 자기 고국 캐나다와 구 소련과 관계개선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일화.

       자, 이제 미뤄뒀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자체 소개만 남은 듯. 바흐의 건반악기 변주곡 가운데에서 가장 긴 곡. ‘골드베르크’는 바흐의 음악 제자다. 그는 18기초 작센의 영주인자 신성로마제국의 주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한테 고용된 클라이버 연주자. 백작은 골드베르크한테 당부한다.

       “자네, 나는 요즘 불면증에 무척 시달린다네. 자네 스승인 바흐한테 가서 ‘잠 잘 오는 음악’을 하나 받아왔으면 좋겠는 걸.”

    해서, 골드베르크가 자기 스승한테서 받아간 30개의 모음곡. 골드베르크가 총연주시간이 90분도 넘는 그 곡을 연주하자, 그때부터는 백작이 숙면을 취하더라는 거. 그 백작은 그 대가로 금쟁반에다 우리 돈 4,000만원에 해당하는 금화(金貨) 를 담아 사례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그래서 그 일화에 따라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고 한다는데... . 기본조성은 G장조. 아리아와 30개 변주 후 최초 아리아가 반복되는, 이른바 ‘아리아 다 카포’로 구성된 곡. 정작 바흐가 붙인 작품명은 꽤나 길고 구체적이다. 1742년 ‘클라이버 연습곡’ 제 4권으로 출판된 작품으로, 바흐는 <2단 건반 ‘클라비 쳄발로’를 위한 아리아와 변주곡들로 이뤄진 클라비어 연습곡> 이라고 이름붙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바흐가 붙인 긴 작품명에는 모든 복잡한 사항이 다 적혀 있다. 연주하기가 꽤 어려운 점까지 포함해서. 그 곡에 등장하는 아리아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입되어 유행하던 민요인 ‘ 양배추와 순무’를 비롯하여 ‘오랫동안 당신을 만나지 못하네’·‘내 젊은 날은 가고’ 등이 들어 있고... .

       어쨌든,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 악보상의 지시어도(?) 무시하고, 당해 악기도 아닌 피아노로, 그것도 통상 90여분 소요되는 연주시간을, 도돌이표 및 최초 아리아가 반복되는, 이른바 ‘아리아 다 카포’를 과감히 생략해버리고서 38분 만에 재해석하였다. 이는 아주 획기적이었다. 바흐가 그 곡을 작곡한 지 정확히 205년 만의 일. 1960년대에 들어 시작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재해석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나도 너도 연주자들은 그 곡에 도전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피아니스트 ‘임동혁’도 2008년에 음반을 내고, 전국 연주 투어를 하게 된다. 손민수는 2016년 74분에 주파, 지용은 2018년 60분 26분 만에 주파 등.

       바흐의 최초 전기작가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겔’은 이렇게 적고 있다.

       ‘ 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바흐가 받은 선물(금잔과 금화) 가치의 천배라도 모자랄 것이다.’

       미국 음악학자 ‘카를 가이링거’는 또 이렇게 적고 있다.

       ‘18세기 최고의 변주곡.’

       숙연해진다.

       ‘ 바흐의 남자, 글렌 굴드, 바흐와 함께 당신도 명복을 누리소서.’

     

       작가의 말)

        

      사실 자료는 몇몇 날 A4용지로 20매가량 메모를 하고, 관련 음악을 듣는 등 챙겼으나, 내 신실한 애독자들께서 너무 지루할성싶어, 나름대로 이처럼 글을 다이어트 했지만... .

      아무쪼록, 부족한 점은 채워서 읽어주시길.

     

       위까지는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92)’ 전뭄이이다. 본인의 개인 블로그,‘이슬아지’에 올린 대로.

       지금부터 그 92화에서 빠뜨린 부분 추가다. 자연, 위 방식에다 제 4화 더하기.

     

       4. 힐러리 한(Hilary Haahn,1979~, 미국)과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힐러리 한’은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스페셜리스트다. 위 ‘2’에서 이미 밝혔지만, 첼로라는 악기는 독주 악기로는 부적합함에도, 바흐는 후대에 올 연주자를 위해 모험적으로(?), 혜안을 지니고 작곡해 두었다. 마찬가지로, 바이올린도 독주악기로는 쓰이지 않았음에도 바흐는 먼 뒷날 오게 될 ‘기린아’를 생각하여, 그렇듯 <무반주 바이올린 ~~>을 적어두었던 게다. 참고적으로, 제목에 든‘파르티타’란, 16세기 말부터 18세기까지 쓰인 악곡 형식이다.‘힐러리 한’은, 1720년(당시 바흐 나이 30세)에 작곡한 이 곡을, 작곡 후 276년이 지난 1996년(힐러리 당시 나이 17세)에 거의 완벽하게 해석하였다. 바흐를, 바흐 사후 246년 만에, 바이올린으로 부활시켰다. 그래서 그녀는 ‘디아파종상(Diapason상)’을 거머쥐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의 스페셜리스트다.

       참고적으로, 그녀는 ‘막스 리히터(Max Richter, 1966~, 독일 태생 미니멀리즘 음악인)’의 < Mercy(자비)>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하다.

       위 큰일들이 모두 바흐의 사후에 일어났다. 바흐의 사후를 기준하면, 멘델스존은 <마태수난곡>으로 79년 만에, 카잘스는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186년 만에, 글렌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205년 만에,그리고 힐러리 한은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로 241년 만에 각각 바흐를 부활시켰다. 바흐의 위대함이여! 마냥 숙연해진다.

       내가, 명색이 수필작가인 내가 위 단락으로 이 글을 맺을 성싶은가. 작금의 예술계의 행태, 특히 수필계의 행태에 관해 ‘바늘 찌름’도 녹아 있다는 것을. 조바심부리며(?) 당대에, 그것도 데뷔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이 무슨무슨 상을 수상하였다느니 책날개에다 요란스레 적어대는 꼬락서니들 하고는! 언제까지 ‘끼리끼리 문학’에 만족해할 거냐고? 사실 40~ 50년 창작활동 이어오고, 5,000여 편 작품을 빚어온 나. 나는 종이책 분량으로 따져, 50권도 넘을 작품을 빚어오지만, 종이책은 철없던(?) 젊은 시절에 달랑 두 권만 연거푸 발간했을 따름. 이는 자랑이다. 바흐의 경우처럼, 앞으로 적어도 200여 년 후 나의 유작들을 연구하고, 소실된 나의 원고를 찾으려고 애쓰는 후배 수필작가가 하나 나타나도 좋으리.

     

       창작 후기)

       다음 이야기 제 152화는, 20대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320km 걸어서, 북 독일 항구 도시에 자리한‘뤼베크 성 마리아교회’ 오르간니스트 ‘ 디트리히 북스테후데’한테서 한 수 배우러(?), 스승으로 모시고자 갔던 이야기로 꾸미고 싶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