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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0) - 7대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
    수필/음악 이야기 2023. 7. 14. 15:19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0)

                                                        - 7대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거의 신화적인 집안내력. 이 글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서양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독일)’ 집안부터 살짝 소개함이 좋겠다. 그 집안에는 200여 년 동안 음악인을 내내 배출한, 음악 명가(名家)다. 이 글 주인공 집안도 ‘바흐’네 집안 못지않다. 무려 7대에 걸쳐,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나왔다.

        조금 더 뜸을 들이겠다. ‘콘트라베이스’란 현악기부터 소개. 중량이 20kg정도 되고, 바이올린족의 현악기 가운데에서 가장 낮은 음역의 4현악기. 더블 베이스, 콘트라바소라고도 하며 줄여서 베이스라고도 한다. ‘콘트라베이스’는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그 악기 이름이다. ‘contra-’는 ‘1옥타브 아래’란 뜻을 지닌 접두어이니, 그 악기가 내는 음이 저음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동안, 첼로와 마찬가지로, 독주악기로는 쓰이지 않았다. 여담. 첼로를 독주 악기로 연주하여 성공한 음악인은 스페인 출신, ‘파블로 카잘스키(1876~1973)’. 그는 10대 소년일 적에 헌 책방에서, 우연히, 자기보다 200여 년 먼저 살고 간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적어둔 악보,‘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사서, 거의 한평생 연구하고 연습하여 환갑을 넘은 나이에 첫 연주회를 가짐으로써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첼로로 부활시켰던 장본인. 그는 말년에, 백악관에 초빙되어, 자기 고국 스페인 카탈루냐 민요인 ‘새들의 노래 (Song Of The Birds)’를 연주하였다. 그 ‘새들’이란, 자기 나라 독재자 ‘플랑코’에 항거하며 한평생 평화를 갈구한, 비둘기의 화신(化身). 그 연주를 들으면 정말 가슴이 뜨거워진다. 가슴 미어진다. 눈물이 절로 나온다.

        이 글 주인공의 노력도 파블로 카잘스키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오케스트라의 맨 뒤편에서 저음을 맡아,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던 콘트라베이스를, 독주악기 반열에 당당히 올려놓았다. 변방의 악기였던(?) 콘트라 베이스를 당당히 독주악기로 끌어올린 그. 여담. ‘더블 리드’를 지니고, 고음을 내는 ‘오보에’는 언제고 오케스트라의 리더 격으로 중앙에 자리하지만... . 사실 그이 이전에 독주악기로서 콘트라베이스 계보는 있어왔다.

        그가 대체 누구? 그가 바로 ‘게리 카(Gary Karr, 1941~ , 미국)’이다. ‘다음 클래식 백과’는 그에 관해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나는 이번에도 ‘콜라주 형태의 수필’ 마다하지 않는다.

     

       <데뷔1962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회. 20세기 최고의 베이시스트로 평가받는 미국의 더블베이스 연주자.

       (중략)

       그러나 18세기 말 도메니코 드라고네티(Domenico Dragonetti)가 더블베이스 솔리스트로 이름을 알린 후 19세기에는 조반니 보테시니(Giovanni Bottesini)와 프란츠 시맨들(Franz Simandl), 그리고 20세기에는 세르게이 쿠세비츠키(Sergey Koussevitzky)가 더블베이스 연주자로 인정받으며 계보를 이어갔다. 최근에는 더블베이스 연주자 게리 카(Gary Karr)가 20킬로그램이 넘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클래식에서 재즈, 팝, 민속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장르를 선보이면서 더블베이스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있다.

        (중략)

        게리 카는 1941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에 걸쳐 대대로 더블베이스 연주자를 배출해온 가문으로, 아버지와 삼촌, 사촌들이 모두 더블베이스 연주자였다. 9세에 더블베이스를 연주하기 시작한 게리 카는 줄리아드 음악원에 진학했고, 1962년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에게 발탁되어 그가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청소년 음악회에서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연주하면서 주목받았다. 이 무대가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에 중계되면서 게리 카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뉴욕 카네기 홀에서 데뷔 리사이틀을 갖는 기회까지 얻게 되었다. 이 데뷔 무대를 통해 더블베이스의 거장이었던 쿠세비츠키의 미망인 올가의 눈에 들어 올가 부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다. 특히 그녀는 게리 카에게 남편이 사용하던 명기, 1611년산 아마티를 선사하기도 했다.

        (중략)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카네기 홀에서의 데뷔 리사이틀 이후 그는 시카고 심포니 런던 심포니, 몬트리올 심포니, 시몬 볼리바르 등과 협연했다. 1967년 게리 카는 국제 베이스 연주자 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Bassists; ISB)를 만들고 더블베이스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더블베이스를 위한 독주곡이 많지 않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피아노와 관현악곡, 성악곡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직접 편곡해서 연주했는데, 특히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더블베이스 버전으로 편곡하여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연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1961년에 솔로로 데뷔한 개리 카는 2001년 시즌을 끝으로 공식적인 연주에 은퇴를 선언했다. 6월 8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마지막 공개 연주회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처음 알리게 해준 청소년 음악회에서 번스타인과 협연한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가운데 ‘백조’를 선보였는데 그의 고별 무대에는 세계 각지에서 400여 명의 더블베이스 주자들이 모여들어 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은퇴 후에도 게리 카는 여전히 더블베이스 재단을 운영하고 음악 캠프를 주관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끝)>

     

       위는 죄다 ‘다음 클래식 백과’에서 따다 붙였다. 하더라도, 수필작가인 윤근택은 할 말이 있다. 왜 이런 말 있지 않던가.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고. 어느 한 분야를, 답이 나올 때까지 파고든다는 거. 위에서 언뜻 소개한 ‘파블로 카잘스키’는 거의 한 평생 그 낡은 악보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연습하고 재해석했다는 거. 이 글 주인공도 남들이 영 아니다 하고 고개 젓는 그 육중한 콘트라베이스도 솔로 악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한테 똑똑히 보여주었다는 거. 거슬러, 그들보다 수 세기를 먼저 살고 간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혜안(慧眼)도 놀랍기만 하다. 그는 기린아가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는... . 그는 그 기린아를 기다리며, ‘무반주 첼로 모음곡’뿐만 아니라 ‘무반주 바이올린 곡’을 미리 작곡해두었다는 거. 그러니 그러니 모름지기 예술가란, 목전(目前)의 이해관계, 이를테면 각종 문학상 따위의 유혹을 훨씬 뛰어 넘는,혜안을 가져야 함을. ‘게리 카’와 더불어, ‘파블로 카잘스키’와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위대함이여!

        사족(蛇足). 내 둘레에 겉멋 든 수필작가들, 아니 수필작가 행세하는 이들이 있어 왔는데, 나는 최근에, 느닷없이 그들을 모조리 내쳤다.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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