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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3) - ‘풍금(風琴)’에 관한 추억과 함께-
    수필/음악 이야기 2023. 7. 20. 19:59

                                농부 수필가가 쓰는 음악 이야기(153)

                                - ‘풍금(風琴)’에 관한 추억과 함께-

     

           윤근택(수필가/수필평론가/문장치료사/음악 칼럼니스트)

     

        본 연재물 제 ‘152’화는, 당시 20세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320km 걸어서, 북독일 항구도시, 뤼베크에 자리한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니스트 ‘디트리히 북스테우데(Dietrich Buxrehude, 1638~1707, 덴마크-독일)’를 알현하러 갔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바흐, 그는 한평생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음악장, 즉 ‘칸토르(cantor)’로 지내며,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였다. 그가 주로 연주한 악기는 ‘오르간’. 그러니 당시 ‘북독일 오르간악파’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오르간니스트였던 북스테후데를 뵙고, 한 수 배우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일 아니었겠는가.

        현대에 이르러서도 오르간 연주자들한테는 북스테후데와 바흐의 오르간곡은 필수코스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들 양인(兩人)의 오르간곡은 연주 자체만으로도 종교적 느낌을 준다. 오르간이란 악기는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음향을 지어내는 데다가 솔로로도 일군(一群)의 관현악단 연주 같아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악기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특히,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이후, 교회에서 오르간 연주를 권장한 몫도 있다고 한다.

        이제 나는 오르간에 관한 이야기 잠시 미뤄둔 채, 추억 한 자락을 부여잡는다.

        한국전 전후 세대인 나. 분명 나는 ‘초등학교 세대’ 가 아닌 ‘국 민학교 세대’다. 시골 국 민 학교. 학년당 3학급이여서, 선배들 6학년 까지 보태면 총 18학급. 그런데 음악 시간이 다소 문제였다. 학교에는 ‘풍금’이 한, 두 대뿐이었다. 음악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당번은 셋을 이끌고 넷으로 짝을 이뤄, 옆 교실로 가서 풍금을 신주 모시듯 옮겨오곤 하였다. 물론 선생님들은 머리를 맞대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총 18학급 전체 음악 시간표를 조율했을 터. 그러다가 우리는 어느 날 낭보(朗報)를 듣게 된다. 일제히 “야호!”하였다. 독지가가 나타나, 학년당 1대씩 풍금을, 무려 6대씩이나 기증했다는 소식.

        운동장에서 특별조회가 열리고, 교장선생님은 교단에서 들뜬 목소리로 전교생한테 전해주었다.

        “여러분, 재일교포인 여러분의‘이정행 선배님’께서 후배 여러분들을 위해 풍금을 사 주시었어요.”

        이정행,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내 고향마을 ‘초막골’의 윗마을 ‘청운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어린 ‘정행’은 그의 부친과 함께 밭에 가게 된다. ‘정행’은 길들지 않은 일소[役牛]의 코뚜레를 잡고 이끌어, 쟁기질하는 부친을 도와주어야 했다. (한이) 맺힌 정행. 순간적으로, 소의 코뚜레를 놓아버리고, ‘훽’ 돌아서서, 부친한테 숫제 발악을 한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아부지, 나는요, 더는 이렇게 가난뱅이로는 못 살겠니더. 나는 곧바로 집 떠날 겁니더.”

        그렇게 하고 홀연히 집 나선 정행. 어찌어찌 하여 일본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익혔던지 일본어에 능통해진 그. 제 2차 대전 패전국인 일본에서, 미국 점령군 최고위직 장교의 통역관이 된다. 점령군의 통역관이 되었으니, ‘이정행이 말목 박으면, 그 구역은 전부 이정행 땅’이 되었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는 일본인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그렇게 마구잡이로(?)챙긴 재산을 고국으로 다 빼돌릴 수는 없었다는데... . 아직도 내 고향 ‘청송’에 가면, 내 고향 마을 ‘초막리’ 아랫동네 ‘솔편(쇠편;금곡1리)’에 그의 공덕비가 서 있다. 그는, 헐벗고 어린 우리들한테 풍금을 선물로 준 이. 그는 풍금을 선물하여, 선생님들로 하여금 음악시간에 페달을 밟아가며 건반을 양손으로 두드려 반주하도록 하였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동요를 목청껏 부르게 하였다. 정말로, 그는 우리한테 꿈과 희망을 주었다.

        내 이야기 다시 본류(本流)로. 종일 ‘오르간의 역사’를 탐구해본즉, 흥미로웠다. 오르간의 기원은 팬파이프(panpipe). 이 팬파이프는 기원 전 6세기경에 고안되었다고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사한 악기가 중국에서 수천 년 전부터 ‘쉥(sheng)’이란 이름으로 존재했단다. 그 ‘쉥’은 ‘입으로 부는 오르간(mouth organ)’이란 별명을 지닌다. 어쨌든, 오르간은 ‘바람[풍]’으로, 여러 개의 굵기와 길이가 다른 ‘조합된 대롱’을 불어서 음향을 내는 건반악기. ‘아코디언’과, 내가 존경하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반도네온’을 두고, ‘손풍금’이라고 통칭한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 그러나 실제로는 ‘바람’ 이전에 ‘물[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걸 ‘물 오르간’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바람 오르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나날 발전한 오르간의 역사를 적자면, 밤을 새워도 부족할 지경. 해서, 이 농부 수필가는 ‘겅중겅중’ 북스테후데와 바흐와 관련된 오르간 제작자만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그 많은 오르간 제작자들 가운데에서는 ‘ 아르프 슈니트거(Arp Schnitger,1648~1719, 독일)’가 있다. 바흐의 출몰연도(1685~1750)와 겹쳐지는 그의 생애. 실제로, 바흐가 연주했던 ‘함부르크 장크트야코비 교회의 오르간’은 슈니트거의 걸작들 가운데에서 하나로 꼽힌단다. 북스테후데는 1687년 그가 제작한 오르간을 테스트하러 함부르크로 여행한 적도 있단다. 오르간 연주에 관한 한 대가들이었던 북스테후데와 바흐한테 그가 얼마나 소중한 이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슈니트거, 그는 목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조각가였다. 18세 때 사촌 밑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3년 후인 1676년(그의 나이 21세 때)에 사촌이 죽자, 독자적으로 오르간을 제작하여 그곳 교회에 기증하게 된다. 그는 살아생전 150여 대의 대형 오르간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후 그 교회에 묻힌다. 그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2명은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였다. 그가 제작한 오르간은 독일 북부 루터교 양식의 오르간. 대체로, 교회에 붙박이로(?) 설치된 대형 오르간이 그러하듯, 그도 대형 오르간을 제작하였다. 그렇듯 교회마다, 제작자마다 대형의 오르간을 경쟁적으로 제작하여 설치하게 된다. 놀랍게도, 오르간은 ‘제작한다’라는 말 대신, ‘건축한다’라고 써온 듯. 오르간을 교회 건물의 일부로 여겨왔다는 방증. 다시 이야기하지만, 마르틴 루터가, “교회에는 오르간이 필수품(?)이다.”라고 함으로써 그러한 일들이... .  당시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들 가운데에서는 북독일의‘슈니터’말고도, 중독일에는 ‘고트프리트 질버만(Gottfried Silbermann,1683~1753)’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오르간 제작은 여러 갈래로 거듭해오다가, 20세기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오르간 제작의 황금시기’라 일컬어지는 바로크 시대의 오르간 제작의 기초를 돌아보게 된다. 바흐로 대변되는 바로크 음악과 바흐 시대에 제작된 오르간을 다시 뒤돌아보게 된다. 그 선봉에 선 이가 의사 겸 신학자 겸 오르간리스트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zer, 1875-1965) 박사. 그는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크게 건축한 오르간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오르간 복고 운동’을 제창했다. 1906년 에는 <독일과 프랑스의 오르간 제작법과 오르간 음악>이라는 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교회면 오르간, 오르간이면 교회’라는 등식을 유지한다.  나는 북스테후데와 바흐를 거듭 들으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 d단조,BuxWv.161)>,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BWV582)>. 두 곡 공히 종교적인 경건함과 웅숭깊음이 절로 묻어난다.

        내 어린 날, 국민 학교 교실에서 들었던 그 작은 풍금의 소리인들 내 어찌 잊으리! 풍금을 모교에 기증했던 재일교포 향인(鄕人) 이정행도 내 어찌 잊으리!

     

        * 이 글은 본인의 티스토리 ‘이슬아지’에서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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